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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사상

도이치 이데올로기

[ Die deutsche Ideologie ]

저자 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출간연도 1846
분야 철학사상

"도이치 이데올로기" 제1부 제1장은 미완성인 채 남겨져있고, 대부분이 엥겔스의 필치로 쓰여졌고 마르크스의 필적으로 정정, 말소, 가필이 되어 있다. 여기서는 우선 유물사관의 원상(原像)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기로 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포이에르바하의 현실적 인간의 입장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다. 포이에르바하는 육체를 갖춘 감상적인 인간이야말로 주체이고, 헤겔철학에서의 정신, 기독교에서의 신과 같은 추상체를 주체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설명했다. 이 인간은 일반적으로 파악된 "인간이라는 것"(der Mensch)이다. 그러나 실제의 인간은 단지 육체를 갖출 뿐 아니라 주어진 역사적 사회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예를 들면 현실적으로 19세기 전반의 독일 사회에서 생활하고 감각이나 의식을 형성해온 독일인이다. 즉 현실적 인간은 역사적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에 지나지 않다.

똑같이 감성의 대상인 세계도 불변의 것이 아니고 역사적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선행하는 세대의 산업과 교통의 성과가 감성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고, 그 위에 현재의 세대가 산업이나 교통을 더욱 발달시키면서 감성적 세계를 변화시킨다. "앵두의 나무는 거의 모든 과수와 같이 오로지 수 세기 전에 교역에 의해서 우리들의 지역에 이식된 것이다. 결국 특정의 시대의 특정의 사회의 이러한 활동을 통하여 비로소 포이에르바하의 <감성적 확신>이 된 것이다." 이렇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포이에르바하의 입장의 비역사성, 비사회성을 비판하고 거기서 사회의 역사가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가를 밝히려고 한다.

역사는 인간들이 만드는 것이기에, 역사의 제1의 전제는 인간들이 생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이 살기 위해서는 식(食), 음(飮), 주(住), 의(衣), 기타 약간의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그러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제 수단의 산출, 물질적 생활 그 자체의 생산이야말로 제1의 역사적 행위인 것이다. 이 물질적 생활의 생산을 전 역사의 근본적 조건이 되는 행위라고 하는 역사관이야말로 유물사관인 것이다. 그러나 제2의 전제로 중요한 것은 이 최초의 욕구가 충족되었다는 것과, 욕구를 충족하는 행위, 욕구를 충족하는 도구가 새로운 여러 욕구를 낳는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제 욕구의 산출도 또한 제1의 역사적 행위인 것이다. 즉 물질적 생활의 생산과 새로운 제 욕구의 산출은 표리를 이루고서 역사의 근본조건을 형성하고 있다.

제3의 전제로, 인간들이 번식하면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도 역사의 근본조건이다. 생산이나 욕구는 이 사회적 관계와 떨어질 수 없게 결합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관계는 최초에 가족으로서 나타나지만, 인구가 증가하고 제 요구가 증가함에 따라 여러 가지 사회적 제 관계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상의 사회적 활동의 세가지 측면은 역사의 출발점 아래 항상 동시에 존재하고 역사의 근본조건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생산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자연에 대한 인간의 작용),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몇 사람의 개인의 협동)라는 이중의 관계로서 나타난다. 따라서 특정의 생산양식 또는 산업단계는 특정의 협동양식 또는 사회단계와 결합하고 있다.

이상의 근원적인 역사적 관계의 네가지 측면을 지적하고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인간이 의식을 갖는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의식은 원래 언어와 결합하고 있고 다른 인간과의 교통 속에서 형성되어 왔다. 이 실천적 의식은 인간의 자연으로의 작용 속에서, 다른 인간과의 협동 속에서 형성되고 발전되어 왔다. 더욱이 인간의 의식이 다른 동물과 다른 것은 자기자신을 의식의 대상으로 한다(對自的)는 점에 있다. 그러나 분업이 나타나고 주로 육체적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과, 그 위에 있으며 정신적 노동만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자, 의식은 실천으로부터 분리되고 머리 속에서만 활동하게 된다. 이 실천적 세계로부터 이탈한 의식의 활동이 순수이론, 신학, 철학, 도덕 등을 낳게 되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실천적 의식이 생산, 욕구, 사회 관계라는 역사의 근원적 계기와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 제 관계 속에서의 생산이 분업을 자연히 성장시키지만, 그것과 더불어 노동과 그 생산물의 양적, 질적으로 불평등한 분배가 생기고 소유가 나타난다. 즉 특정의 사람에게만 귀속하고 다른 사람이 손을 내밀 수 없는 생산물이 나타났을 때에 사적 소유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분업과 사적 소유가 성장하는 동시에 집단의 공동의 이해와 각 개인 혹은 각 가족의 이해(특수이해)와의 사이에 모순이 생기고, 공동의 이해는 곧 국가라는 자립적인 모습을 취한다. 그러나 국가는 실은 환상에서만 공동성의 모습을 가질 뿐이고, 지배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제 계급을 실제적 토대로 하여 성립할 뿐이다. 이렇게 분업과 사적 소유가 진행함에 따라 생산력 기타의 사회적인 힘이 제 개인의 결합된 힘으로서 나타나지 않고, 제 개인에 있어 소원한 강제력으로서 나타나게 된다. 즉 사회의 제력으로부터의 제 개인의 "소외"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혁명이 수행되어야 하나, 그 전제로서 이 상태에 대한 저항, 반항의 태세가 대다수의 사람들 속에 생겨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생산력의 발전과 더불어 대다수의 사람들이 무소유의 상태가 되고 그리고 교통의 발달과 더불어 이 경험이 국지적이 아니고 크게 확대되는 것이 전제가 된다. 다른 관점에서 말하면 생산력이 발전함에 따라 현재의 제 관계 아래서 생산력이나 교통수단이 다만 해(害)만을 끼치고 파괴를 가져오는 단계가 도래하고, 그것과 결부하여 사회로부터 무거운 짐만 지게 되고 이익이 주어지지 않는 계급이 사회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어 근본적 혁명의 필요와 필연에 대한 자각, 즉 공산주의적 자각이 나타난다.

그리고 현존의 사회적 제 관계는 국가를 통한 지배계급의 힘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으므로, 사회의 근본적 변혁을 목표로 하는 혁명적 투쟁은 지배계급과 국가권력에 맞서게 된다. 공산주의 혁명은 사적 소유에 따른 소외된 노동, 계급지배 그 자체를 일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즉 사회적 제력(諸力)을 의식적으로 제어하고 제 개인의 결합한 힘으로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공산주의적 자각을 대량으로 낳기 위해서도 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도 많은 사람들의 변화가 필요하지만, 그것은 실천적 운동, 혁명적 실천을 통하여 비로소 이루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공산주의는 목표나 이상보다도 현상을 지양(止揚)해가는 현실의 운동 그 자체라고 해야한다. "도이치 이데올로기"에 있어서 유물론은 대체로 이상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이 책 속에서 현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첫째로 유물론에 대한 이해라는 점이 중요하지만.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전개과정에서 유물론은 사고와 존재, 의식과 물질의 어느 쪽이 근원적인가라는 인식론의 틀 속에서 논하게 되었다. "반 뒤링론"이나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언"에서의 엥겔스의 서술은 그러한 경향을 조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이치 이데올로기"에서는 그러한 인식론적 틀 속에서 유물론이 생각되고 있지 않다. 의식은 육체를 갖춘 인간의 활동이지만, 그 인간은 현실의 역사적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그 역사적 사회의 기본적 존재양식은, 물질적 생활의 생산, 새로운 욕구의 산출, 사회적 제 관계라는 세가지 계기에 의해서 규정되고 있다는 것이 유물사관에서 유물론이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1장을 재검토하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쓴 "그룬트리세(Grundrisse)"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제 개념, 제 표상, 의식의 생산은 당초에는 직접적으로 인간들의 물질적인 활동이나 물질적인 교통, 현실적 생활의 언어에 편입되어 있다. 표상하거나 사고한다는 것, 인간들의 정신적 교통은, 여기서는 아직 그들의 물질적인 관련 속에서의 직접적인 유출로서 나타난다. 정신적 생산-한 민족의 정치, 법률, 도덕, 종교, 형이상학 등 언어로 서술된 것-에 대해서도 같은 것이 적용된다. 인간들이 그들의 제 표상, 제 관념 등등의 생산자인 것이다.

그러나 다만 그 경우의 인간들이란, 그들의 생산 제력과 그것에 조응하는 교통의 특정의 발전에 의해서, 교통의 가장 넓은 편성에 이르기까지 제약되어 있는, 현실적이고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의식이란 의식된 존재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인간의 존재란 그들의 현실적인 생활과정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와 의식과의 관계에서가 아니고, 생활과 의식과의 관계, 특히 역사적 사회에 있어서의 생활과 의식과의 관계가 문제되는 것이고, "의식이 생활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는 것이 유물사관의 입장인 것이다. 경제, 정치, 문화를 포괄하는 사회에 있어서의 의식의 존재양식의 해명은 현재의 우리에게 과해진 큰 과제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로 여기서 교통(Verkehr)이란 용어가 자주 사용되고 있으나 이것은 넓은 내용을 가지고 있다. 개개의 개인, 사회집단, 그리고 국가, 그러한 것 사이의 물질적 및 정신적인 교통을 넓게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교통형태나 교통관계 등에서 생산력에 조응하는 것으로서 표현될 때, 그 내용은 후의 "생산 제 관계"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동시에 거기서는 정신적 교통(커뮤니케이션)의 양식이 물질적 교통의 양식과 결합되어 생각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미 본 것처럼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언어나 의식이 물질적 생활의 생산이나 사회적 제 관계와 긴밀히 얽혀서 발전되어 왔다는 입장에 서있는 것이므로 거기서 사회적 언어론이나 사회적 의식론이 전개되는 맹아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실천적 생활로부터 이탈한 의식의 생산물인 도덕, 종교, 형이상학 등이 "그룬트리세(Grundrisse)"에서 이데올로기라고 불리우고 있다는 것도 주목할만 하다. "이데올로기"의 존재양식에 대한 논의는, 여기서 물질적 노동과 정신적 노동과의 분업이 결합되고 있는 것처럼, 사회의 총체적 구조나 문화의 기본적 존재양식과 결합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셋째로 사회적 분업과 "소외"가 결합되어 자연성장적 분업의 지양(止揚)이 목적으로 되어 있음이 주목된다. 이 경우 분업은 기업내 혹은 기업간의 분업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 내의 분업은 노예적 지위에 있는 처나 아들들이 주로 육체노동을 담당하고서 그 생산물에 관여하지 않는 한편, 주인인 남편은 정신적 활동만 맡고서 생산물을 자기 것으로 한다. 여기에 사적 소유가 나타난다고 하나, 이 분업은 또한 계급대립(부르주아=남편, 프롤레타리아트=처, 아이들)과 결합하는 것은 명백하다. 따라서 분업의 지양은 계급대립의 지양과 일체를 이루는 것이 된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기본적인 사회적 분업에 그치지 않고 그 역사적 전개를 제시하고 있다.

농경노동(농촌)과 공업 및 상업노동(도시)과의 분리를 제1로 들고 있고, 그것과 더불어 부족소유에서 고대의 공동체 소유 및 국가소유로의 이행이 제시된다. 그리고 더욱 농촌에 있어서 봉건적 혹은 신분적 소유, 도시에 있어서의 동직(同職)조합적 소유라는 중세의 소유형태가 제시된다. 이러한 문맥을 더듬으면 도시와 농촌과의 분열, 대립의 지양이 사회적 분업의 지양의 하나의 기둥이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문제는 오늘날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된다. (분업의 지양이 전문적 직업노동에의 고착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이미지와 결합되어 있는 곳도 있지만, 이것은 위의 문맥과는 이질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넷째로 생산 제력에 의해서 규정되고 거꾸로 그것을 규정하는 교통형태가 "시민사회"라고 불리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이 "시민사회"야말로 "전 역사의 참다운 아궁이이고 무대이다"라고 한다. 이미 교통에 대하여 말했듯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단계에서는 "생산 제 관계"라는 경제적 카테고리에 국한하지 않고 훨씬 넓은 인간의 사회적 제 관계를 생각하고 있었다고 생각되어 흥미롭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이 단계에서 시민사회의 존재양식을 파악한 것은 근대 자본주의를 해명하면서 행하였다는 점이다. "시민사회는 생산제력의 일정한 발전단계의 내부에서의 제 개인의 물질적 교통의 전체를 포괄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단계의 상공업 생활의 전체를 포괄하고 있고 그 점에서 국가나 국민을 넘어서고 있다."-그런데 시민사회라는 말은 18세기에 소유 제 관계가 이미 고대적 및 중세적인 공동체에서 벗어났을 때 나타났다. 시민사회가 시민사회로서 발전하는 것은 부르주아지와 더불어 이지만, 어느 시대에도 국가 및 기타의 관념론적 상부구조의 토대가 되고 있는, 생산과 교통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전개되는 사회적 조직체는 항상 이것과 같은 이름으로 불리어 왔다.

즉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근대적 소유관계를 통해서 부르주아지와 더불어 발달한 근대의 시민사회를 우선 파악하고, 그 작용(상부구조의 토대로서의 작용)을 확인한 다음, 그 토대로서의 존재양식을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사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물사관이 전형적으로 타당한 것은 영국을 비롯하여 유럽의 근대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 그 이외의 사회에 적용할 때는, 여러 가지 부대조건을 고려에 넣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제시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경제학비판" 서언에 있는 유물사관의 정식화가 너무나 간결하게 쓰여져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마르크스나 엥겔스가 어떠한 구체적인 내용을 생각하고 있었는가를 아는 것은 어렵다. 그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물사관의 공식화와 한정된 적용이 곧 나타나서 새롭게 상부구조의 토대로부터의 상대적 독립성이나 토대로의 반작용이 문제로 되기에 이르렀다. "도이치 이데올로기"를 정확히 읽어내는 것이 유물사관의 이해에 있어서 불가결한 것이다.

출처

제공처 정보

한권의 책으로 읽는 명저의 총합. 철학편에서는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파스칼의 팡세,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등을, 정치사상편에서는 홉스의 리바이어던, 로크의 통치론, 루소의 사회계약론 등을 수록했다. 아울러 경제사상에서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레닌의 제국주의론, 마르크스의 자본론 등을 수록했다. 자세히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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