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고등학교 졸업생 뉴스레터 [너머의너머] 1호
"다들 잘 지내?" 
문득 이렇게 외치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자꾸 뒤돌아보는 사람은 나뿐인가 궁금합니다. 그럴 때면 누구에게라도 전화를 걸어 학교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집니다. 이제는 지겨운 이야기라 해도 말이에요. 그런 마음이 어딘가에 또 존재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너머의너머]를 시작합니다. 한달에 한번 메일함에 도착할 우리의 이야기가 간디고등학교 너머를 향하고 있는 당신을 조금 덜 외롭게, 조금 덜 막막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2021.10.30 
에세이
‘간디고등학교’와 그 이후를 주제로 한 졸업생들의 에세이를 전합니다. 학교에 대한 기억, 전하지 못했던 말들, 이제야 이름을 붙인 마음들과 새롭게 사랑하게 된 것들에 대해 씁니다.  
고바다 / 20기
졸업 후 아무 준비도 없이 서울에 올라와 얼레벌레 눈에 보이는 일들을 해내며 살고 있습니다. 그 시간이 마냥 순탄치만은 않았고요. 그럴 때면 도대체 다른 사람들은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궁금해하곤 했습니다. 겁도 많고 욕심도 많습니다. 최근 새롭게 갖게 된 취미는 새 보기이고, 가벼운 것과 귀여운 것을 좋아합니다. bada4510@gmail.com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

오전 8시에 알람이 울리면 잠자리에서 일어난다. 여유가 되면 아침을 먹지만 보통은 물 한 컵만 마시고 집을 나선다. 10시까지 일을 하러 갔다가 7시에 집에 돌아온다. 저녁은 대부분 집에서 밥을 차려 먹는다. 밥은 언니가 준비할 때도 있고, 내가 지을 때도 있다. 밥을 먹고 아침에 급하게 나가느라 어질러진 방을 정리한다. 한숨 돌리다보면 어느새 졸음이 몰려와 깜빡 잠이 든다. 매일 반복되는 일과지만 나쁘지 않다. 졸업을 한 지 1년 반, 이제는 조금 안정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졸업 당시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 갈 곳이 정해지지 않은 채 졸업을 했다. 학교를 다닐 적에는 진로를 정하는 데 큰 의욕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3년간 쌓여왔던 어떤 무력감과 학교 ‘바깥’을 향한 겁 때문이었던 것 같다. 3년간 내가 나를 만들어나가고 표현했던 곳은 학교뿐이었다. 그러다보니 그 모습이 바깥에서는 어떻게 보일지 잘 상상되지 않았다. 그 가늠할 수 없음이 설렘, 기대보단 두려움이란 감정으로 다가왔다. 특히 3학년 때는 학교 안에서의 관계나 하고자 했던 일들이 잘 풀리지 않았던 때였다. 나를 포함한 학교 전체가 미워보이고 불안정해보였다.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전부 프로페셔널해 보이는데 내가 이 안에서 가져온 고민과 시간들은 남들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운 것, 아마추어의 것 같았다. 얼른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가도 또 이곳을 벗어나는 게 두려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진학이나 졸업 이후 바로 소속될 곳을 정해두지 않은 것은 일종의 도피였다. 나를 내보여야 할 상황들로부터의 도피. 평가되고 재단될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서 결정한 도피. 당시 자주 했던 “잠시 쉬며 앞으로의 방향을 생각해보겠다(이 말을 하면 더 이상 아무도 졸업 후의 계획을 묻지 않았다. 마법 같은 문장이었다.)” 같은 말 뒤에는 그런 마음들이 숨겨져 있었다. 그렇지만 학교를 다닐 때에는 그 마음들을 잘 몰랐다. 저마다 바삐 갈 곳을 찾아 준비하는 친구들 옆에서 멀뚱히, 불안함인지 부러움인지 서운함인지 모를 마음으로 지내다 졸업을 했다.

이후에는 언니를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환경이 바뀌자 그제야 졸업이 실감이 나며 앞으로의 시간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런 준비도, 대비도 없는 채로 무방비하게 맞이한 졸업의 후폭풍은 대단했다. 바깥을 향한 두려움은 여전했고, 무언가라도 해야 할 것 같지만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이 항상 나를 따라다녔다. 친척이나 주변인의 ‘어떻게 지내고 있냐’는 사소한 안부인사에도 알맞은 대답을 찾지 못해 한참을 쩔쩔맸다. 어떻게 살아도 시간을 죽이며 살고 있는 것 같아 초조하고 조급한 날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주 외로웠다. 다정한 사람들과 느슨하고 친절한 커뮤니티를 종종 만났지만 그곳에선 온전한 소속감을 느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졸업과 동시에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코로나를 핑계로 새로운 만남들을 더 피하곤 했다.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채로 관계를 맺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나를 드러내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 것만 같아 마음이 울렁거렸다. 내가 당장 사라져버려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무서워 종종 눈물이 나기도 했다. 따뜻한 말과 차를 나누는 시간을, 포옹을, 누군가 몰래 놓고 가는 쪽지 같은 것들을 그리워하면서도 그럴 때마다 자신이 너무 나약하게 느껴져 그 마음마저 꼭꼭 감추었다. 다른 이들은 있어야 할 곳을 착실히 찾아 가고 있는데 나만 붕 떠있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서 다시 무언가 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졸업 후에는 학교를 다녔을 때의 모습과는 달라져야 한다고 믿었다. 어설프고 부끄럽던 학교의 시간들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의식적으로 그때의 시간들을 외면했던 것 같다. ‘완전히 새롭고 사람들과 잘 융화되는 나’를 상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결국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학교의 기억을 찬찬히 되짚으며 지금 내가 원하는 곳, 나를 필요로 하는 곳들을 찾기 시작했다.
 
정말 안정된 상태에 들어왔다고 느꼈던 건 얼마 전 서울시에서 청년일자리 지원 사업을 발견해 작은 제로웨이스트 사업단체에서 일을 하게 된 후부터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아 불안정한 시간들에 못 이겨 결국 취직(?)을 하게 되었고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졸업 후 조급하고 불안했던 시간은 너무 길었는데 그에 비해 그 상태가 변하는 순간은 너무 짧았다. 물론 그 전의 빌드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불안정한 시간 속에서도 무언가를 계속 찾아다녔고 일상의 변화들과 만남을 쌓았기에 찾아온 안정감이었다. 취직은 졸업 후 내가 쌓아왔던 경험 중 뭐랄까, 가장 노골적인 성공의 경험이었다. 나에게는 그 일이 과거 학교에서의 경험을 바깥 사회로 확장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취직을 필두로 자원활동을 했던 ‘사직동 그가게’에선 티베트 소식지를 만들었고, 친구의 소개를 통해 작은 동화책 삽화를 그리면서 나의 일들을 만들어나갔다. 이제야 겨우 다시 무언가를 하고 있다 느낀다. 졸업 후 이 시간이 찾아오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아직까지 같은 공간, 비슷한 사람들, 여전히 불확실한 미래 속에 있는데 처음과는 다르게 느껴지는 게 신기하다.
 
여전히 나는 학교를 다닐 때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 비슷한 생각의 흐름과 감정의 결을 가지고 있고 별로 달라진 점도 없다.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학교의 기억이 불쑥불쑥 나타나 당혹스러운 때도 종종 있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다. 미워하고 불안했던 시간들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을만한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그때의 기억에 휩쓸리지는 않을 것이다. 한동안은 이런 여유가 지속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진로 소개
졸업생들이 활동하고 있는 다양한 직업과 진로를 소개합니다. 졸업 이후 ‘일’을 고민하는 당신에게,  앞서 걷고 있는 누군가가 일의 솔직한 슬픔과 작고 단단한 보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김혜민 / 5기
12년차 활동가입니다. 일과 일상의 경계가 없는 편이고 요리할 때의 몰입감을 좋아합니다. 본업 외에 비건 친구와 함께 두유요거트를 판매하고 있어요. 유리병을 재사용하기 위해 배달하고 수거하는 수고가 크지만 뿌듯함도 커서 2년째 하고 있습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애정이 많아요. 자연을 통해 위로받고 타인을 통해 존재감을 느낍니다. 걷고 자전거 타고 뛰는 것을 좋아합니다. sidolife8@gmail.com
나의 문제가 사회와 공명하도록 

- 활동가 되어가기

간디학교 교생실습 간디학교 6년을 다니며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어져 대학에 갔다. 산청 간디로 교생실습을 가서 현실을 마주했다. 나와 학생들의 성숙도 차이가 크지 않았고, 경험이 없는 내가 진로 부분에서 도움 줄 것이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고등학생들의 지적 욕구를 채우기에 내가 가진 지식과 공부가 부족했다. 부족한 내 모습으로 가르치는 일을 시작할 수 없었다. 

사회적경제   나의 노동이 자본주의 사회를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균열을 만들면서도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혁명은 불가능하니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이 필요했다. 돈도 벌면서 좋은 일도 할 수 있다는 ‘사회적경제’에 관심을 갖고 당시 고용노동부 홈페이지에서 무작정 사회적기업 리스트를 수백 개 펼쳐보고 태양광 관련 기업 대표님께 만나자고 연락했다. 그 분은 술을 사주며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이상적인 거 아니라고 조언해주셨다. 
 
‘아름다운가게’   사회적기업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했다. 특히 고용노동부 인증 1호 사회적기업인 ‘아름다운가게’는 환경 이슈를 일상의 소비와 기증, 자원봉사의 선순환구조로 풀어낸 것이 경이로웠다. ‘지구특공대’에서 6년간 회장을 했던 나에게 이 모델은 실질적이고 이상적이었다. 취준생활 1년 동안 한껏 위축되어 있던 나를 뽑아준 ‘아름다운가게’는 열정을 다 바쳐도 아깝지 않은 진짜 첫 직장이었다. 대표인 박원순 씨를 통해 ‘소셜디자이너’라는 꿈을 꾸게 되고, 시스템이 잘 갖춰진 ‘아름다운가게’라는 이름을 뒷배 삼아 힘껏 일했다. 4년 가까운 시간 동안 자아실현도 하며 직업인이자 생활인으로 자립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주었다. 
 
‘서울시 청년허브’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태어나는 사람들은 지역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경험한다. TV에는 실제로 본 적 없는 광화문과 남산타워, 국회의사당이 자주 등장한다. 내가 사는 지역의 뉴스는 서브로 다뤄지고, 중요한 메인 이슈는 다 서울에 있는 것만 같다. 대입의 성공 기준은 ‘인서울’이고 그래야 부끄럽지 않은 자식이 된다. 학비가 없어서 지방 국립대를 다닌 나는 서울에서 일하고 싶었다. 제대로 된 캠퍼스 생활도 서울에서 가능해 보였고, 각종 모임과 문화예술은 다 서울에 집중되어 있었다. 대학 때 여자라고 학과 일요축구모임에 끼워주지 않았고, 여자는 회장시키면 잘 못한다고 예비역을 내세우는 남자들이 경악스러웠고, 총학생회장 후보일 때 ‘걸레’, ‘빨갱이’라는 네거티브로 나를 공격한 것을 후에 알았다. 서울의 선진문화 속에 살면 이런 구시대적인 끔찍한 일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겪은 지역/문화/정치/여성에 대한 차별의 해법은 다 서울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말랑말랑한 또래 청년의 언어와 높은 감수성으로 청년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말하는 ‘청년허브’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싶었다. 하지만 중간지원조직이라는 행정기관이 썩 잘 맞진 않았다. 나는 누군가를 지원하는 역할보다 직접 현장의 문제를 다룰 때 에너지가 높은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청년 이슈를 어떻게 접근하면 좋을지에 대한 감각,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당사자이자 전문가로 청년을 바라보는 태도 등을 습득할 수 있었다. 
 
- 우리의 질문에 답하는 일
 
지역, 청년, 거버넌스   대학 내내 겪은 차별의 경험으로 인해 지역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긴 나는 서울로 떠나고만 싶었다. 막상 서울에 왔지만 억울했다. 가해자들은 가해한 줄도 모르고 편하게 사는데 나는 지역을 피해 서울로 도망 온 기분을 해결하고 싶었다. 문제를 직면하기 위해 다시 지역으로 갔다.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1년간 열심히 운영했다. 나의 소득이 지역 내 이해관계와 무관하고 고객이 지역 외부에 있다는 것이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운이 좋아서 많은 게스트들과 관계를 맺고 좋은 추억을 쌓았다. 지역 청년들의 필요를 파악하고 사람들과 시나브로 관계를 맺으며 지역을 이해해갔다. 
그 후 ‘청년허브’에서 배웠던 것처럼 우리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한 시도를 시작했다. 삼삼오오 내 또래 친구들을 모아서 내가 지역에서 느끼는 문제, 지역을 떠나고 싶은 이유, 그럼에도 이 지역에 살고 싶은 이유들을 질문하고 이것들을 정책으로 변환시키는 작업을 했다. 청년일자리만을 위한 조례가 아니라 청년들의 삶 전반을 바라보는 정책적 태도를 만들기 위해 행정과 협업해서 설문, FGI, 정책캠프 등으로 청년들의 이야기를 모아내고 이를 청년기본조례에 녹여내는 아카데미와 간담회를 열었다. 조례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청년정책을 토론하고 숙의하는 거버넌스 기구가 잘 작동할 수 있도록 조직하고 촉진하고 제안하는 활동들을 했다. 청년들의 활동기반이 될 수 있는 공간이자 예산을 지원하는 센터까지 만들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니 내가 무엇을 더 할 수 있을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지금 하라면 하지 못할 밀도 있는 활동들이 가능했던 이유는 지역에서 겪었던 후진 문화를 바꿔내겠다는 목표가 개인의 역사를 직면하고 싶은 의지와 결합해 강하게 작동했던 것 같다.
 
‘서울시 청년활동지원센터’   나에게 거버넌스란 데모의 밀레니얼 세대 버전이다. ‘386’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길거리에 나가 짱돌을 던졌다면 우리 세대는 거버넌스를 통해 세상을 바꾼다. 다양한 이해 주체와 동등하게 정보를 공유하고 토론하고 협의하는 숙의 과정을 통해 합의를 이뤄가는 거버넌스 과정이 나에게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자 대안이었다. ‘청년허브’에서 시작해 현장에서 당사자들의 목소리로 지역을 바꿔내는 경험을 하고 나니 그 다음이 궁금해졌다. 이제는 무엇을 해야할까. ‘청년활동지원센터’는 청년수당을 받는 청년들을 매니징하는 기관이었다. 서울시 청년정책거버넌스를 통해 청년들이 만든 정책이 청년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책으로 기능하려면 수당만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더 필요할까? 그것을 전달하기 위한 전달체계는? 그 질문에 답하는 일을 하는 곳에서 다시 일을 시작했다. 
 
‘민달팽이주택협동조합’   지금 나는 500명의 조합원으로 구성된 ‘민달팽이주택협동조합’의 이사장으로 선출되어 일하고 있다. 300여 명의 청년들이 입주해 살고 있는 17개의 주택을 운영하고 있다. 서울의 반지하, 옥탑방, 고시원 일명 ‘지옥고’로 대변되는 열악한 주거환경에 사는 청년들의 주거권에서 시작해 집이 사는(buy) 곳이 아니라 사는(live) 곳으로 인식되기 위한 비영리주택모델을 실험하고 있다. 
 
코로나 시대의 청년단체 활동가   코로나 4단계로 인해 석 달째 재택근무 중이다. 지겹지만 어쩔 수 없다. 주거권과 협동조합에 관련한 강의나 입주자들을 위한 교육이 많은데 1년째 모두 비대면으로 진행하고 있다. 심지어 거리에서 모이는 행사도 온라인으로 모인다. 우리는 회의가 많다. 각 팀장들을 중심으로 소통하는 회의도 있고, 업무 담당자들의 결정을 존중하지만 전체회의를 통해 각자의 생각을 나누고 기준을 정하고 함께 결정한다. 조직의 미션, 비전이 중요하고 이를 매일의 업무에 구현하기 위한 생각의 ‘동기화’를 위해 많은 시간을 소통과 공유에 투여한다. 청년단체이다보니 교육, 행사의 시간이 평일 저녁이나 주말일 때가 많아서 업무시간과 개인 일정 조정을 미리미리 잘 조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주 40시간 근로를 지키기 위해 평일에 자유롭게 쉬는 편이다.
  
- 활동가라는 직업
 
활동가의 정의   활동가의 정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을 나누곤 한다. 특정 직장에 다니는 것이 활동가가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문제의식에서 시작해 자신이 서 있는 현장에서 자기 문제를 해결하고, 그것이 사회문제로 확장되고 맞닿아 있는 것을 감각하는 모두가 활동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든 중간지원조직에서 일하든 사회적기업에서 일하든 나는 활동가인 것이다. 이 과정에 가장 중요한 건 이 문제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나는 이 문제를 왜 해결하고 싶은가, 왜 변화시키고 싶은가에 대한 자기 질문과 대답을 해나갈 때 이 일을 오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새롭게 만난 관계들, 지지해주는 동료들, 변화를 체감하는 경험들이 동력이 되어 고민을 진전시켜준다.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안 해봤던 경험들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일을 시작하는 다양한 경로   ‘제3섹터’라 불리는 청년, 시민사회, 사회혁신, 사회적경제, 도시재생, 마을공동체에서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여러 경로가 있다. 특히 서울시는 뉴딜일자리 정책, 지역 교류 일자리 등을 통해 일 경험이 없는 청년들이 사회에 진입해 일 경력을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서울시 생활임금 수준(약 220만원) 급여로 첫 직장 시작하기에 나쁘지 않고, 많은 내 또래 청년들이 이 경로를 통해 ‘제3섹터’에 진입했다. 간디에서 배웠던 가치를 실현하면서 살아가기에 좋은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닷페이스’, ‘씨리얼’처럼 사회변화를 이야기하는 미디어,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제로웨이스트 라이프스타일을 만드는 ‘알맹상점’과 ‘농부시장 마르쉐’ 등 사회변화를 모색하는 새로운 물결들이 많고, 간디 졸업생들도 곳곳에 많이 일하고 있다. 급여는 적지만 감수성 있는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해나갈 수 있는 자유도가 더 있다. 스스로 단체를 만들어서 사업비를 통해 시작할 수도 있고 경로는 매우 다양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변화를 만드는 수많은 점   활동가로 사는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 넘게 활동가로 일하고 있는 것은 내 삶과 내가 살아갈 사회에 대해 정직하게 응답하고 싶은 이유 때문이다. 우리가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근로자의 권리를 보장받고 돈이 없다는 이유로 안정된 주거에서 배제되지 않고 혐오 없는 성평등한 사회, 자본의 세습으로 불평등이 심화되지 않고 차별 없이 누구나 자기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를 만드는데 구체적으로 기여하고 있다는 느낌은 내 삶에 효능감으로 다가온다. 그런 매일 매일이 모여 내 삶을 긍정하게 되고 그 과정에 나와 비슷한 결을 가진 사람, 진실한 사람들을 만날 때 기쁘고 고맙다. 공명심이나 거창한 변화가 아닌 나와 내 주변을 변화시키며 걸어가는 인생으로 나의 매일을 채워가고 싶다. 그 매일에 간디학교 졸업생들이 더 많이 걸어오면 좋겠다. 좋은 것은 함께 누리고 싶으니까. 
인터뷰
졸업생들을 인터뷰한 글을 싣습니다. 함께 지냈던 네가 혼자서 걸어간 길에 대해 묻습니다. 낯익은 얼굴로부터 낯선 이야기를 듣습니다.
임석영 / 14기
오래된 그림과 물건에 대해 공부합니다. 유물 너머에서 그것을 만들고 애호했던 누군가의 마음을 발견하기 위해 박물관에 자주 갑니다. 그리고 그만큼 자주, ‘매일매일이 요지경인 세상 속에서 이렇게 고요하기만 한 옛것들을 들여다보는 일이 무슨 소용일까’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나의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믿고, 조금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sylim0905@naver.com
안녕하세요,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14기 졸업생 임석영이고요, 올해 8월에 대학교를 졸업했고, 내년에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서 지금은 입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대학에서는 고고미술사를 공부했어요. 대학원도 같은 전공으로 진학하려고 하고요.

조금 늦게 대학에 가야겠다는 결정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늦은 입시 결정도, 그렇게 해서 선택한 전공을 더 깊이 공부해보겠다는 결정도 고민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원래부터 그 쪽에 관심이 있었나요? 고등학교 때는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고, 관심있는 것이 많았다고 들었어요.
이전부터 전공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긴한데, 중학교 생활기록부 장래희망란에 고고학자라고 써있더라고요. (웃음) 간디학교 면접 때에도 무슨 과목을 제일 좋아하는지 묻는 질문에 역사라고 대답했던 것 같고요. 그때부터 진지하게 고민했던 건 아니었어요. 미래에 대해서 자세한 계획이 있다기보다는 항상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생각하는 편이기도 하고, 사촌오빠도 간디학교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큰 고민 없이 진학을 결정했어요. 야자하기 싫은 마음도 좀 있었던 것 같고. 
간디학교에 들어가서는 활동을 많이 했어요. 동아리도 여러 개 했어요. '솔뫼'도 하고, '역사사랑'도 하고, '언니네'도 하고, 밴드도 하고... 그때는 그런 걸 준비하고 무대에 올리는 것이 제일 재미있고, 거기에 열을 쏟고 그랬던 것 같아. 그런데 그런 생각도 했어요. '아, 나 좋아하는 거 되게 많다. 그런데 뭔가 하나를 정해서 해야될 것 같은데. 다들 딱 자기 것인 잘하는 것이 하나씩 있는 것 같은'. 나는 여기저기에 다 끼여있긴 한데, 뭔가 좀...' 

간디고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이 한번씩은 고민해봤을 것 같아요. ‘여기에서 나는 뭐지? 내 캐릭터는 뭐지?’
맞아요. 그래서 아직도 기억나는게, 저는 네팔로 봉사활동을 가게 되어서 졸업식 전에 인사를 하고 먼저 학교를 떠나게 됐었거든요. 축제 준비가 한창이던 즈음에 인사를 겸해서 식구총회에서 앞에 나가서 글을 읽었는데, 제가 이런 말들을 썼었어요. ‘나는 뭔가가 되어보려고, 그러니까 앞에 자기만의 수식어가 붙는 사람이 되어보려고 노력한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남는 게 없다는 느낌이 든다.’ 그때 마지막까지도 그걸 울면서 얘기했던 기억이 나. 어떤 존재로 인정받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죠.

졸업과 함께 대학교 진학이 아닌 해외봉사를 선택한 것도 비슷한 고민에서였나요?
어떤 길을 가고 싶은지 결정을 못했으니까. 그리고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어요. 왜냐하면 그날 그날을 열심히 사느라고 대학을 갈 스펙을 만들어두지 않았고, 아마 수시를 쓸 수 없었을거예요, 제가. 수시에 필수인 과목과 시수가 있는데 좋아하는 수업 듣는다고 안 채워놓은 거지. 그 사실을 저는 대학교 입시 준비하면서, 그러니까 졸업하고도 한참 있다가 알게 된 거지만. 가장 크게는 그냥 당장 뭘 하고 싶은지, 뭘 할 수 있는지를 결정 짓지 못했어요. 당시만 해도 대학에 간다는 것이 대안의 대척점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요. 그 즈음이 반값 등록금 이슈로 시위도 많이 하던 때였고,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나 대학에 왜 가야하는지를 묻는 다큐멘터리, ‘김예슬 선언’ 같은 것들이 화제이던 때였어요. 당연히 저도 영향을 받았고, 대학이 과연 이름값을 하는 곳인가에 대해서 의문이 있었어요.

그래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 같아요.
고3 여름방학 지나고 정신 차려보니 친구들이 다 원서를 쓰고 있었어요. 나는 안 가기로 했는데. 그때 같이 우리 대학 가지 말자고 '도원결의'한 친구들도 있었는데, (웃음) 다들 수시 준비하느라 바쁘니까 쌤들의 관심도 거기에 집중되었고, 붕 뜬 것처럼 고민만 많았던 것 같아요. 진로 수업에서도 청년세대의 삶이나, 대학에 가지 않는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고 생각도 했지만, 실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많이 접해보지 못했던 것 같아요. 나는 대학에 가지 않는 삶이 나에게 맞을 거라는 생각은 드는데, 실제로는 뭘 할 수 있는지 몰랐어요. 서운하지는 않지만, 졸업생들 중에는 여러 가지 선택을 거쳐서 필드에 나가있는 사람들이 꽤 있고, 대학에 안 간 사람들도 있으니까 연결을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어요.

네팔은 어떻게 가게 된 건가요?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대학에 가지 않겠다는 결정은 변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래도 할 건 있어야 되잖아. 내가 이렇게 졸업하면 그냥, 백수가 되는 건데? (웃음) 어느 날 학교 전산실에서 해외봉사 프로그램 모집 공고를 보게 됐어요. 코이카의 산하 단체인 민간협력단체에서 '꿈꾸는 청년 봉사단'이라고, 고등학생들부터 20대 초반 정도까지의 사람들을 모집해서 6개월 단위로 해외에 봉사활동을 가는 프로그램을 1기로 시작한 거였어요.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그게 페이스북에 들어왔고, 그걸 봤고, 1지망으로 아프리카를 가고 싶다고 썼어요. 어떻게 거기를 간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어. 꼭 졸업하고 봉사활동을 갈거야, 까지는 아니지만 언젠가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는데 시기가 잘 맞아 떨어진거죠. 내가 학교 마무리하면 바로 가는 일정이니까, 일단 6개월을 그렇게 보내보면 되겠다. 그 안에서 내가 어떤 관계나 계기를 만들어서 더 찾아나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길 테니까, 일단 가보자. 그래서 친구들이 대학 원서 접수하고 면접 준비하고 이럴 때쯤 저는 준비했죠. 최종적으로는 네팔에 가게 됐어요.

설레는 일이기도 하지만 두렵기도 하고, 조금은 막막한 시간이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일단 해외에 나오긴 했는데, 언젠가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뭔가 떠 있는 느낌이 들었을 것 같기도 하고.
3년 동안 간디에서 지내고 그 활동을 바로 이어서 시작한 거잖아요. 스스로 좀 위축되어 있었어요. 간디 다닐 때에는 내가 막, 엄청 괄괄한(웃음)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데, 막상 간디 밖에서 누구랑 관계를 새로 맺는다고 생각을 하니까 갑자기 엄청난 압력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일 자체보다도 전혀 생경한 사람들이랑 일을 한다는게, 그런 상황에 부딪히면서 되게 위축이 됐었어요. 아, 이거 힘들다. 보통 일이 아니구나.

일은 어땠나요?
힘들기도 했지만, 새로운 일을 실제로 해보니까 나 자신에 대해서도 알게 되는 것들이 있었어요. 제가 일했던 단체가 저랑 안 맞았던 것일수도 있겠지만, 현지에 뚝 보내져서, 6개월이 지나면 다른 사람으로 대체된다는 아쉬움도 강했고, 자율적으로, 소통하면서 일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느낌도 받았어요. 그게 그 분야의 일반적인 모습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때의 저에게는 막연하게 관심이 있던 분야에 직접 부딪혀보면서 맞추어보는 경험이었죠. 저 자신에 대해 좀 더 명확하게 알게 되면서 같은 분야의 일을 계속 하기보다는 다른 길을 생각해보게 됐어요.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어땠나요?
춘천에 있는 본가에서 지내면서 건강을 조금 돌보다가, 지인을 통해서 지역예술단체에서 일을 하게 됐죠. 문화기획 쪽에도 관심이 있었는데, 솔직히 뭐하는 곳인지 잘 모른 채로 갔어요. 가서 진짜 많은 일들을 했죠. 예술단체 일이라는 게 대부분 지원사업을 받아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하고, 결과보고서를 내고... 정말 여러가지 일들을 해야하잖아요. 문서 정리도 하고, 웹진 발행하는 일도 돕고, 행사 세팅하고 진행도 하고. 거기에서도 6개월 정도를 일했는데, 재미있었지만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일을 마무리하고 영국으로 워킹홀리데이를 가야겠다는 계획을 세우게 됐어요.

그런 결심은 어떻게 하게 되는 건가요? (웃음)
워킹홀리데이를 언젠가 가고 싶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마침 그 때 애인이 영국에 있었어서, 장거리 연애를 끝내고 싶기도 했고. (웃음) 영국은 다른 나라들이랑 다르게 비자가 기본적으로 2년이어서 더 오래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가서 무슨 일을 하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또 하나의 경험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결심을 했죠. 

굉장히 바쁜 20대 초반을 보내고 있었네요. 학교를 졸업하고 계속 뭔가를 쉬지 않고 찾아다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워킹홀리데이를 준비하면서도 다른 일을 했다고 들었고요.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웃음)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기다리는 기간이 몇 달 정도 비어있었는데, 그 사이에도 춘천마임축제에 지원을 해서 운영팀 막내로 일했죠. 지역에서 하는 청년 인문학 모임 같은 데에서도 활동하고 그랬어요. 시간이 비면 안될 것 같다는 불안감이 있어서였던 것 같기도 해요. 다른 친구들은 재수를 하기도 하고, 대학에 가기도 하는데, 나는 쌓이는 게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계속 찾았던 것 같아요. 뭐라도 해야 나한테 뭔가가 생기니까. 또 그런 것들을 찾아다니면서 내가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하게 됐으니까, 나는 거기서 좀 뭔가 의미랄까, 나름대로 만족을 했던 것 같아. 

그런 활동들 중에서도 워킹홀리데이는 큰 모험이라고 느껴졌을 것 같아요.
사실 진짜 아무 생각 없이 갔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하지만.

지금의 진로를 결정하게 된 것이 영국에서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다니게 되면서였다고 들었어요.
원래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엄청 좋아한다는 정도까지의 확신은 없었는데, 큰엄마랑 큰아빠가 화가셨어요. 어렸을 때 서울에서 큰아빠가 전시를 한다거나 하면 따라가서 봤던 기억이 있었던 거죠. 사실 그림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웃음) 그런 기억들이 남아있어서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가는 걸 자연스럽게 생각했고, 어디 놀러가면 코스에 넣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영국에 가서도 그런 곳들을 그냥 다닌 거지. 그리고 유럽의 박물관들은 무료로 오픈되어 있는 곳들도 많아서, 그냥 어디 가면 간 김에 박물관 가보자 하면서 많이 다녔고. 그러면서 막연하게 가지고 있었던 관심이나 흥미들이 하나의 어떤 것으로 연결이 됐어요.

그런데 영국에 가서는 어떤 일을 했던 건가요?
저는 레스토랑에서 서빙을 했는데, 직업은 먹고살기 위해서 한 거고 그 외 시간에는 하고 싶은 걸 하고 휴가 내고 여행을 가고, 그렇게 지냈어요. 영어를 잘했던 것도 아니었어요. 영어 실력의 지표가 다양하겠지만 일단 그때 저의 토익 성적은 710점이었어요. (웃음) 저는 겁이 많은 편은 아니라서, 그냥 가면 되겠지하는 생각으로 갔던 것 같아요. 그런데 도착해서 바로 일을 구하려니까 도저히 안되겠다 싶더라고요. 저는 브리스톨이라는 지방 도시에서 지냈는데, 어학원에 등록을 해서 오전 시간을 보내고, 오후에는 이력서도 써보고 구직 공고도 찾아보면서 보냈어요. 구직만 4개월을 해야 했어요. 영국에 가기 전까지 야금야금 모아서 들고 간 돈을 4개월만에 전부 탕진을 했지. 그래서 한 달만 더 해보고 안되면 그냥 돌아가자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일이 구해졌어요. 그러면서 남아있게 됐죠. 일하면서 미술관을 계속 다니기 시작했고. 다 합쳐서 2년 정도 영국에 있었어요.

그때의 경험이 명확한 전환점이라는 생각이 드나요?
그런 것 같아요. 조각조각 흩어져있던 나의 관심들이 하나로 연결이 된 시점이랄까. 그러면서 어떤 걸 하고 싶다는 생각이 명확해지기 시작한 때였던 것 같아요. 영국에 있는 동안에는 곧바로 대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에 돌아와서 이걸 어떻게 계속해나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보니 대학에 가면 이런 걸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는 학과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됐고, 그 분야에서 직업을 가지려면 대학을 나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됐고요.

그렇게 해서 입시를 준비하게 되는 거네요. 대학에 몇 살에 입학을 하게 된거죠?
24살에 입학을 했어요. 여름에 한국에 돌아왔거든요. 돌아와서 ‘그래, 그러면 올해 수능을 한번 준비해보자'하고 시작을 했어요. 그런데 입시에 대한 지식이나 감이 너무 없는 거예요. 정시가 뭔지, 수시가 뭔지도 그때 알게 됐어요. 수시를 쓸 수 없다는 것도 그때 알았고. 무조건 수능을 봐야하더라고요. ‘아, 내가 결국 돌고 돌아서 여기 왔구나.’ 아까도 말했지만 간디학교에서 친구들 몇몇이랑 대학 가지 말자고 ‘도원결의’했을 때, 대학이라는 교육기관에 대한 회의도 있었지만 수능으로 대표되는 입시 제도가 너무 많은 아이들을 힘들게 한다는 게 큰 이유였거든요. “우리는 이렇게 우리를 일렬로 줄 세우는 거 하지 말자!” 그런데 내가 네팔 해외봉사 하면서 구르고 춘천마임축제에서 구르고 영국 워킹홀리데이 가서 구르는 사이에 다른 친구들은 다 대학 갔더라고. (웃음)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 여유가 생기기도 하는 것 같아요. 대학이 꼭 그런 의미만을 갖는 곳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하고.
이제는 두 가지 측면이 공존한다고 보게 됐어요. 대학을 다니고 졸업을 한 지금, 대학이 어떤 문제를 가진 기관이라는 생각은 여전히 들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필요한 지식의 커리큘럼을 효율적으로 소화하고 중요한 자격을 확보할 수 있게 해주는 곳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대학생들을 위한 지원도 다양하게 있고, 비슷한 나이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마주할 기회도 많고요. 그런 생각들을 대학에 가서 깨닫게 됐어요.

석영의 표현을 빌리자면 계속 현장에서 '구르는' 일을 하다가, 갑자기 앉아서 수능 공부를 하는 변화가 힘들기도 했을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도 공부 안했으니까, 몇 년 만에 필기구 사보고. (웃음) 공부도 힘들긴 했지만 수능을 준비한다는 사실 자체도 힘들었던 것 같아요. 수능이라는 제도가 불합리한 측면들을 가지고 있다는 건 지금도 여전히 하는 생각인데, 내가 평가받을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는 게 너무 싫었어요. 하지만 나는 이게 필요하니까 ‘그래도 하자’, 이렇게 된 거죠. 나의 상황에서 대학이 갖는 의미를 명확하게 설정하고 나니까 결정은 자연스럽게 따라온 것 같아요. 
실질적인 어려움도 있긴 했어요. 여름에 귀국을 했고, 9월에 수능 공부를 시작했으니까 짧게 준비할 수 밖에 없었거든요.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안되면 내년에 다시 봐야겠다고 생각했었어요. 제가 지원했던 전형은 수학과 영어 중에 제출할 성적을 선택할 수 있어서, 저는 수학 공부를 아예 안했어요. 고고미술사학과를 갈 수 있는 학교들을 찾아봤는데 몇 개 안 되더라고요. 입시전형의 요구조건을 감안하면 더 한정되어 있었고요. 효율적으로 준비를 해야했어요.

그 해에 입학을 했으니, 결과가 기대했던 것만큼 나왔나봐요. 
기대 이상이었죠. 애초에 1년 더 해야한다고 생각하고 하고 있었는데 한번에 갈 수 있게 된거니까요. 안하던 공부를 하려니까 너무 힘들어서 일주일에 두 번씩 울고 그랬던 것 같아요. 제가 수능 보던 해에 지진이 나서 수능이 일주일 연기됐었어요. 그 일주일 사이에 제일 열심히 했던 것 같아. (웃음) 

일주일에 두 번씩 울었어요? (웃음)
공부를 하면서 내가 보는 문제들이 수능을 위한 문제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문제에 맞는 선지를 골라내기 위한 것 말고는 의미를 찾을 수 없다고 느껴졌거든요. 그동안 다양한 경험을 많이 해서 더 그렇게 느꼈던 것 같기도 해요. 영국에 있는 동안 아이슬란드에 여행을 갔었는데, 쉽게 볼 수 없는 자연 경관들이나 신기한 지형들을 보면서 정말 대지를 체험하는 느낌을 경험했었거든요. 저는 세계지리를 했는데, 문제에 제가 실제로 가본 곳들이 하나씩은 나와요. 이게 어떤 지각 현상에 의해서 발생된 거라는 걸 외워서 맞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런 생각을 문제를 풀면서 계속 하는 거죠. 간디학교의 수업이랑도 많이 비교가 되고요.

대학에 입학하고서는 어땠나요?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는지도 궁금해요.
주변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었는데, 한쪽에서는 제 선택을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보는 시선이 있었어요. 내가 대학 진학에서 벗어나 있다가 그런 선택을 하니까, ‘넌 좀 다를 줄 알았는데’ 하는 시선도 있었던 것 같아요. 다른쪽에서는, 오히려 간디학교 선배들 중에 ‘잘됐다, 대학에 가면 생각보다 배울 게 많다’는 얘기를 해주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입학하고 나서는, 주로 전공 공부나 학과에서 진로와 연결해서 제공해주는 프로그램들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 같아요. 나는 무엇보다 이런 걸 공부하고 싶어서 여기에 온 거였으니까 그런 갈증을 해소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오히려 고민하게 만든 일들은 학생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었어요. 학생회에서 문제를 저지른다거나, MT에서 여장 대회를 한다거나. 여기에 소속된 사람으로서 내가 어떻게 해야할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런 일들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느끼면서도, 내가 어디까지 나설 깡이 있는 건가, 생각보다 내가 나서서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네,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어떤 일들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저의 1순위는 전공 공부였지만, 내 상황에서 내 에너지가 닿는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자고 생각하고 작게나마 문제제기에 동참할 사람들을 조직하거나 문제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거나 했죠. 제가 다른 학생들보다 늦게 진학을 해서 나이가 많다는 점이 생각지도 않게 도움이 되기도 했어요. 예를 들자면 동기들에게 16학번은 굉장히 무서운 선배지만, 저한테는 동생인 거니까. (웃음)

그리고 이제는 졸업을 하셨어요. 혹시 또래들보다 조금 늦은 진학과 진로 선택에 불안할 때가 있지는 않나요? 그럴 때에는 어떻게 하시나요?
너무 늦은 건 아니라는 생각을 자주 해요.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남들 갈 때 가야되는 이유가 있는거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고, 저도 그런 얘기 많이 들었거든요. ‘너 졸업하고 나면 스물 여덟, 아홉인데 인문계열 학과 나와서 어떻게 살거냐’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런데 저는 그냥 ‘나는 괜찮아’라고 생각을 해요. 저랑 같이 입학한 대학 친구들 중에 이미 고고미술사라는 진로에 대해 확신을 단단하게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 있었거든요. 저는 확신을 갖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고, 그 친구들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결국 나에게는 나의 페이스가 있는 거라는 생각을 가장 많이 하고, 너 졸업하면 서른인데 어쩌려고 그러냐는 이야기를 들어도 ‘그러게요, 서른이네’ 그렇게 생각하고 말아요. (웃음)

그리고 이제 대학원을 준비하고 계시다고요.
대학에 오기 전부터 결국 대학원도 가게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했었어요. 어렴풋이 생각은 했는데 대학에서 그게 확고해지긴 했죠. 지금은 두 가지 이유가 다 있어요. 이 공부가 재밌고, 그리고 이쪽에서 계속해서 일을 하기 위해서 현실적으로 필요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조금 더 구불구불한 길을 거쳐서 이곳에 다다르게 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인터뷰를 해보니 어떠신가요?
닥치는대로 살았구나. (웃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바로 바로 올라타면서. 그런데 저는 그 시기들이 지날 때마다 정리를 했거든요. 글로 쓰면서요. 스스로 확신이 없을 때 그걸 다시 읽으면 힘이 생기기도 하고, 마음을 다잡는데 도움을 받기도 해요.

지금 간디학교에 있는 학생들도 대학을 진학할지 하지 않을지, 다른 걸 좀 더 해보다가 갈지를 많이 고민하고 있을 것 같아요. 혹시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내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그에 맞는 선택을 해야하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내가 짜여지지 않은 삶에 어느 정도 불안함을 느끼는 사람인가도 중요하거든요. 불안을 많이 느끼는 사람에게는 대학의 짜여진 커리큘럼과 관계들 속에서 경험을 쌓는 시간이 오히려 어떤 자유를 주는 것 같고, 불안을 덜 느끼는 사람에게는 대학 바깥에서 더 직접적으로 부딪혀보면서 적성이나 관심을 찾는 것이 효율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하늘이 무너지는 일은 없다는 말도 해주고 싶어요. 간디학교에서 내가 만족하는 시간을 후회없이 보내는 것과 미래에 다가올 불안 사이에서 고민이 클 것 같아요. 이 선택 때문에 나중에 대학에 가기 어려워지는 것은 아닐까, 그게 나중에 뭔가 큰 문제로 다가오게 되는 건 아닐까, 아니면 반대로 나중에 내가 나의 가치관을 포기하는 선택을 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안 들 수는 없겠지만, 너무 자책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석영에게 간디학교는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열일곱에서 열아홉까지, 그 미묘한 나이대의 3년을 꽉 채우는 기억을 남겨준거죠. 깊이 행복했던 삶의 순간들로 남은 것이고요. 물론 단순히 행복했다고 결론 짓기에는 굉장히... 복잡한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사실 간디학교에서 함께 보낸 시간과 학교가 각자에게 갖는 의미에 대해서 제가 단언을 하는 게 조심스러워요. 학교에서는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고, 졸업 이후에도 각자에게 많은 일들이 있었을 거고, 저도 그렇고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마음들도 있고요. 졸업한 뒤에야 보이는 각자의 사정들이 생각보다 다양하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뭉뚱그리자면 저에게는 행복하게 남아있는 거예요. 그렇게까지 밀도 높은 관계 속에서 보낸 시간들이, 그 기억들이 어쨌든... 제 삶에 어떤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해요. 각자의 이야기들을 더 많이 서로 나누고, 들어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저에게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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