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으로 되살아난 한양의 절반 ‘여성’

김보미 기자

서울역사박물관 보고서 발간

재산 늘리기 적극적이던 여성들

전문직업인 ‘무녀’의 재조명도

순조 25년(1825년) 무렵 김정호가 만든 한성부 지도 ‘수선전도(首善全圖)’에 표시된 무녀들의 집거촌. 수선은 서울을 뜻한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순조 25년(1825년) 무렵 김정호가 만든 한성부 지도 ‘수선전도(首善全圖)’에 표시된 무녀들의 집거촌. 수선은 서울을 뜻한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저녁 여덟 시가 되면 한양은 여성들의 공간으로 변한다.’

19세기 조선의 수도 한양을 찾았던 지리학자 이사벨라 비숍은 이렇게 회고했다. 18세기 들어 인구 30만명을 넘는 도시로 성장한 한양. <북부장호적> 등을 바탕으로 한양의 여성인구를 추정하면 17세기 11만6801명에서 19세기 말 16만2141명으로 늘었다. <현종실록> 등을 보면 한양도성 안은 남성보다 여성 인구가 많았지만 역사에는 이들의 이름은 물론 흔적도 희미하다.

왕실 여성들은 국왕을 정치적으로 돕거나 견제하는 권력을 가졌고 궁인들과 의녀. 다모, 직비 등은 국가 행정을 수행했다. 사대부에서는 가족을 부양하고 집안을 일으켜 세웠으며, 평민과 천민 여성들도 상인, 객주, 주점 등 상업 활동을 한 주체였지만 ‘누구의 부인’ ‘누구의 딸’ ‘성씨’ 기록뿐이다.

서울역사박물관이 7일 발간한 보고서 ‘한양의 여성 공간’은 왕비부터 다양한 신분의 여성들이 유교적 통치이념과 종법적 가족 질서가 강조되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저마다의 삶을 개척하며 치열하게 살았던 기록을 복원했다.

왕비 정순왕후(貞純王后), 사대부 부인 김돈이(金敦伊), 의녀 취엽(翠葉), 인향(仁香), 나인 노예성(盧禮成), 상인 김조이(金召史), 무녀 용안(龍眼), 불덕(佛德)…. 한양에 살았던 여성들의 이름이다.

이번 보고서를 보면 당시 여성들은 재산을 늘리는 치산이재(治産理財)를 중요한 덕목으로 인식했다. 집안의 전답을 경영하거나 공인권 매도, 고리대를 통해 가계 살림을 맡았다. 18세기 <해동화식전>에 기록된 9명의 거부 중 김극술의 부인 ‘박씨’와 ‘청파동 과부 안씨’가 포함돼있다. 박씨는 당귀로 매매차익을 실현했고, 안씨는 원산 객점 투자로 자금을 모았다고 한다. 또 채소나 과일, 분과 족두리를 파는 상점을 운영하거나 경영이 어려울 땐 정부에서 거액을 빌려 적극적으로 사업을 한 여성들도 있다.

도성 밖에서 전염병을 치료하고 백성 구휼 활동을 담당했던 활인서에는 무녀들이 있었다. 이들의 거주지는 ‘활인새 뒤골’ ‘신당동’ ‘무원교’ 등의 지명으로 남아있다. 그동안 법도에서 벗어난 음사(陰祀)의 대상으로만 기록됐던 무녀들은 활인서에서 아픈 이들을 치료하고 가난한 이들을 돌봤으며 활인서 운영에 필요한 재원인 ‘무세’를 납부하는 시민이었다. 보고서는 “이번 연구를 통해 무녀를 의료 및 사회복지 업무에 종사한 여성 전문직업인으로 재조명하게 됐다”고 설명한다.

남자 의원에게 진맥받기를 꺼리다 병을 키워 사망하는 일이 빈번하자 제생원 관원이 부인과 치료를 돕는 의녀의 선발을 요청하면서 조선 초 의녀제도가 공식화됐다. 또 <경국대전>에 급료를 지급한 기록이 남아있는 산파도 의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여성들이었다.

‘원컨대 이 몸이 이 공덕으로 다음 생에는 남자로 변하여 (중략) 영원히 번뇌로부터 벗어나서 마침내 부처를 이루게 하소서.’

경기 의정부 원효사에서 발견된 인조 4년(1626년) 상궁 최씨가 필사한 법화경의 발원문이다. 엄격한 유교 질서를 따랐던 한양에도 흥천사·흥덕사·원각사 등 큰 사찰과 암자들이 있었는데 이곳은 왕실은 물론 양반 사대부 여성들의 치유의 공간이었다. 왕실 여성들이 귀의한 비구니절인 자수원과 인수원, 정업원에는 왕과 사별하거나 역모에 연루된 집안의 여성들, 나이든 상궁들이 거처했다.

사찰에서 여성들은 가족의 번영과 다복, 죽은 가족의 극락왕생을 주로 빌었지만, 남성으로의 환생 기원도 특히 한양과 근교 사찰에서 다수 등장했다고 보고서는 전한다. 현재의 고된 삶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었던 셈이다.

정수인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정순왕후를 비롯한 왕비의 이름을 남긴 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점에 놀랐고, 남성으로 환생을 기원하는 발원을 통해 당시 여성들의 삶을 추측할 수 있었다”며 “이번 연구가 가려졌던 한양 여성들의 이름이 드러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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