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 졸업작품 들고 국제도서전 간 ‘보부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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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3.02.07. 오전 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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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베이국제도서전 참관기]
이경선 한경대 디자인과 교수
수업작품 50점 혼자 공수·전시
김연수·손원평 작가 초청돼
대만 독자들에 ‘책의 위로’
타이베이 국제도서전이 열린 엿새 동안 모두 50만5000명이 다녀갔다. 임인택 기자


“국내에선 학생은 아마추어라고 인식해요. 평가가 인색하죠. 국제 무대에선 동등해요. 전문 출판사도 아닌데 타이베이 국제도서전에 와야 할지 많이 망설였어요. 잘 왔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달 31일부터 지난 5일까지 열린 타이베이 국제도서전에서 만난 이경선 한경대 디자인학과 교수가 말했다. 영락없는 ‘그림책 보부상’이었다. 네 개 수업에서 학생들이 만든 그림책 50여권을 홀로 공수해 와 홀로 부스를 지키며 대만 국내외 방문객을 맞았다.

국외 출판사 5곳이 현지 출판 계약을 검토하기로 했다. 대만의 한 출판사는 조만간 한경대를 방문할 예정이다. 중국 상하이의 한 문구회사에선 그림 등을 상품화할 방안도 검토하기로 했다. 전시된 책들에 매료된 이 회사의 부사장은 이메일을 이 교수에게 보내왔다. 학생들에게 전해달란 얘기가 담겼다. “다른 문화권에 대한 도전을 두려워 마세요.”

대만에 번역 출간된 이수지 작가의 그림책을 주제로 평론가가 강연하고 있다. 임인택 기자


4일 오후 전시장 한 부스에선 지난해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을 수상한 이수지 작가의 그림책을 소재 삼은 대만 커첸화 평론가의 강연(‘현실과 환상의 경계-북아티스트 이수지의 경계 3부작’)이 빈 객석 없이 진행 중이었다.

그 시각에 만난 이경선 교수는 <한겨레>에 “2017년 이탈리아 볼로냐 어린이도서전도 망설이다 갔는데 프랑스 출판사가 ‘너무 좋다’며 전세계 독점 판권(출판 배포권)을 사 간 졸업작품(<반대말>)이 있었다. 그 학생이 지금은 바리스타를 한다”며 “창작을 지속하긴 너무 어렵다. 안타깝지만 극소수의 작품만 주목받는 게 창작세계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 세계를 대표해 김연수, 손원평 작가가 이번 도서전에 초청됐다. 공히 한국 문단을 대표하지만 스스로 우회하거나 웅크렸던 시간이 짧지 않은 작가들이다. 이들이 대만 독자들에게 전한 위로의 힘은 커 보였다. 4일 오후 2시, 5시대에 1시간씩 진행된 ‘한국 작가와의 만남’에서였다. 대만에서 번역 출간된 <세계의 끝 여자친구>(2019)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2020)의 작가 김연수는 “적대적으로 보이는 타인의 세계를 이해해보려는 사람들을 소설로 쓰고 싶었고, 현실에서 그런 이들에게도 내 책이 힘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31일부터 2월5일까지 타이베이 세계무역센터에서 열린 타이베이 국제도서전에 출판사 부스를 차린 이경선 한경대 교수가 제자들의 책을 내보이고 있다. 임인택 기자


지난 4일 도서전 관람객들이 이경선 교수가 차린 출판사 부스에 진열된 책들을 보고 있다. 임인택 기자


<아몬드>(2018)와 <서른의 반격>(2019)이 소개된 손원평 작가는 “꿈을 이루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고 그렇게 오래 걸릴 걸 알았다면 안 했을 테지만 그걸 모르기에 또 하는 게 아닐까. ‘뭐든 더 해도 좋다’고 말씀드리고 싶다”며 “이해할 수 없고 싫을 수도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실패한 40대 남성의 나직한 재기’를 주제로 한 최근 소설 <튜브>도 곧 번역 출간될 예정이다.

두 북토크 모두 방청한 20대 후반 대만 여성 장유리는 “한국 문학을 좋아하고 한국어 공부도 할 겸 들었다. 다른 문자나 언어로 전해지는 이야기를 이해하려고 할 때 전혀 새로운 감정과 만나게 된다”며 “김 작가가 슬럼프 땐 글을 안 쓴다고, 스스로가 행복하지 않으면 다른 누구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고 말해 힘이 됐다”고 말했다. 그동안 대만에서 한국 책은 학습만화, 실용 에세이 등이 주로 보급된 편이었으나 최근 문학 작품과 작가들에 대한 관심이 가파르게 커지고 있다. 한국번역문화원의 지원을 받아 대만에 소개된 국내 문학 작품은 2017년까지 전체 7종에 불과했으나 2018년부터 한해 15~17종 번역되고 있다. 조남주 작가가 2018년 <82년생 김지영>으로 인기의 물꼬를 텄고, 김영하 작가가 10종으로 가장 많은 현지 작품 목록을 갖고 있다. 지난해엔 김초엽, 정세랑 작가의 작품이 번역 출간됐다.

31회 타이베이 국제도서전에 초청된 김연수 작가(가운데)가 지난 4일 오후 독자와의 대화를 통해 책의 가치를 설명하고 있다. 임인택 기자


31회 타이베이 국제도서전에 초청된 손원평 작가(가운데)가 지난 4일 오후 독자와의 대화를 통해 <아몬드> 창작 경위 등을 설명하고 있다. 임인택 기자


중화권 출판 시장의 가늠자로 구실을 하는 타이베이 국제도서전(31회)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도서전을 취소하거나 대면 행사를 중단한 지 3년 만에 본래의 형태로 재개해 엿새간 50만5천명이 다녀갔다. 지난해 서울북페어의 다섯배다. 출판사와 에이전시는 33개국서 470곳이 왔다. 한국 또한 3년 만에 13개 출판사가 직접 전시관을 차렸다.

이경선 교수가 학내 벤처로 만든 출판사의 부스도 그중 하나로, 전시장 2만3450㎡를 꽉 채운 1393개 부스 가운데서도 가장 미력한 데라 할 만하다. 하지만 그는 전시 내내 분주히 자리를 지켰다. 출판사들을 지원하는 대한출판문화협회(출협)가 2일 오후 마련한 ‘한국관 리셉션’이 30분도 안 돼 60인분 음식이 동날 만큼 북적였으나 정작 이 교수는 가지 못했다.

“학생들 작품이 모두 딱 한권씩이라 값으로 매길 수도 없이 중요하거든요. 비울 수가 없어요. 부스를 찾아온 사람들 사진을 찍어 학생들에게 보내고 있습니다. 호응을 많이 받아 큰 동기부여가 되고 있어요.”

지금 웅크렸을지언정 그 학생들 가운데 특별전의 주인공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타이베이 국제도서전에서 여럿이 속삭이고 있었다.

타이베이 국제도서전에 차려진 한국관. 임인택 기자


타이베이 베이터우구에 위치한 공립도서관(시립도서관 분관) 내부. 나무를 주재료로 지어진 친환경 건물로도 유명하다. 지난 5일 도서관 실내외 곳곳에서 시민들이 책을 읽고 있었다. 이 도서관에서도 타이베이 국제도서전 관련 행사를 진행한다. 임인택 기자




한국 출협, ‘구글·애플 상대 수수료 공동소송' 일본과 대만에 제안

3년 사이 한국의 위상은 대만에서도 확연히 높아졌다. 2021년도 출간 서적 가운데 번역서는 1만6991종(전체의 29.4%)인데 일본, 미국, 영국 다음으로 한국이 큰 비중(4.6%)을 차지한다.

다만 규모나 방문자 수에도 불구하고 이번 도서전의 한축은 ‘벼랑 끝 위기감’이랄 수밖에 없겠다. 비전과 문화의 향연장인 국제도서전으로선 이례적으로 출판 위기를 전면에 내세운 ‘진솔한’ 세션들을 구성했고, 대만 출판인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지난 1~2일 이틀에 걸쳐 진행한 ‘위기 시대 살아남는 법’ 제목의 전문가 포럼이 대표적.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한 대표적 출판 에이전시(S. Fischer Verlag·Holtzbrinck 출판그룹)의 최고재무책임자인 로버르트 셰퍼나커(Robert Schefenacker)는 종이값·물류비 상승, 책 소비시장 위축과 같은 유럽 실태를 짚으며 글자, 판형 등의 표준화, 종이 질 하향조정, 이전 출간 도서 활용과 같은 여러 방안을 제시했다. 작가와 작품 발굴 전략, 소셜미디어 활용법도 미국·영국 등지에서 온 전문가들로부터 소개됐다.

1일 열린 한국·일본·대만 3개국 출판 전문 포럼도 그중 하나다. 주일우 출협 부회장은 포럼에서 “지난 10년간 한종당 평균 초판 발행 부수가 절반으로 줄었다. 더 좋은 책을 만들려는 경쟁은 지속되지만 책은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며 “대형 온라인 플랫폼, 출판을 산업이 아닌 관리 대상으로만 보는 정부와 관료주의에 맞서고, 책 콘텐츠의 영화, 드라마 등 비즈니스적 확장을 위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50대 대만 출판업자는 출판 위기 환경을 극복한 성공 사례를 연사들에게 물었으나 일본출판사협회의 세이이치 히구치 사무총장은 “답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출판 시장의 현주소인 셈이다. 그는 대신 “도서관을 풍요롭게 해 어렸을 때부터 독서 동기를 부여하는 사회 메커니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주일우 부회장은 스마트폰에서 전자책 같은 유료 콘텐츠를 구매할 때 사용되는 “인앱결제 방식을 통해 수수료를 과도하게 과금(30%)하는” 구글과 애플을 상대로 하는 미국에서의 공동소송을 대만과 일본에 공식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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