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 포럼] 푸틴의 머릿속 세상

입력
수정2023.02.07. 오전 12:56
기사원문
채병건 기자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채병건 국제외교안보 디렉터
도대체 어떤 생각을 했길래 21세기에 이토록 무모한 침략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을까. 1년 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시작한 우크라이나 침공 얘기다. 뉴욕타임스(NYT)의 우크라이나 전쟁 기획 보도(Putin’s War)에서 푸틴의 머릿속을 유추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한 대목을 찾았다.

“푸틴은 16개월 동안 서구 지도자들과 단 한 차례도 직접 대면한 적이 없었다. 대신 어딘지 모르는 미스터리한 장소에서 화상 회담만 했다.” 또 다른 구절이다. “푸틴을 만나는 이들은 먼저 사흘을 격리한 후에야 거의 15피트 거리를 두고 대면할 수 있었다.” 푸틴이 대면 접촉에 예민했던 건 코로나19 때문으로 보인다.

“서구의 포위는 러시아에 위협”
선과 악, 아군과 적 이분법 신념
우크라 침공 따른 이득 불투명
중국이 되레 과실 챙길 가능성

지난해 11월 29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법관 회의에 참석한 푸틴 대통령. [AP=연합뉴스]
자발적이든 강요됐든 고립은 대가를 요구한다. 고립은 왜곡된 믿음의 나선 효과를 강화한다. 외부와의 소통을 피할수록 우리만의 세상이 전부가 되고 나의 믿음만이 더욱 진리가 되며 편견과 고집이 나선처럼 머릿속으로 파고든다. 반대로 바깥에선 문고리 권력이 정사를 좌지우지하며 공식 시스템을 뛰어넘는다.

고립을 선택했던 푸틴이 머릿속에 만든 세상, 즉 이를 ‘푸틴 유니버스’로 칭한다면 그 첫 기둥은 ‘외부의 위협’이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침공을 반년가량 앞둔 2021년 7월 발표한 글(‘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의 역사적 연대에 관하여’)에서 우크라이나에서 “반러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라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인이 뿌리와 조상을 부정하고 러시아를 적으로 여기도록 강요받고 있다”고 분노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서구의 포위로 간주했다.

그의 둘째 기둥은 ‘순결한 우리’다. 푸틴은 같은 글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와의 관계를 “영적 결속(spiritual unity)”으로 묘사했다. “우리의 영적 결합이 공격받고 있다”고 규정했다. 반면 그에게 서구는 도덕적으로 혼탁해졌다. “성평등 정치로 인해 어머니와 아버지가 ‘부모1’과 ‘부모2’로 대체됐다”는 게 푸틴이 자주 거론했던 서구 비판이었다.(NYT)

푸틴 유니버스의 셋째 기둥은 의로운 전쟁이다. 바깥의 악한 세력에 맞서 영적인 연대를 지키는 성전(聖戰)이다. 푸틴은 과거 소련이 악의 세력 ‘나치 독일’과 전쟁을 했다면 이젠 우크라이나를 삼키려는 네오 나치와 싸워야 한다는 논리를 만들었다. 그는 위의 글에서 “급진주의자들과 네오 나치들이 점점 더 무례하게 야욕을 드러내고 있다. 관료 조직과 지역 토호가 이들을 비호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2021년 10월 당시 나프탈리 베네트 이스라엘 총리가 푸틴을 만나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푸틴과의 회담에 관심이 있다는 얘기를 꺼냈다고 한다. 그러자 푸틴은 “이 사람과는 할 말이 없다”며 “젤렌스키는 도대체 어떤 유대인인가. 이 사람은 나치의 조력자”(NYT)라고 비난했다. 유대인인 젤렌스키가 유대인의 적인 나치에게 부역하다니 이해할 수 없다는 분노가 담겨 있다. 하지만 젤렌스키가 ‘유대인 나치 부역자’인가.

이리 보면 푸틴의 세계는 할리우드 액션영화나 SF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선한 우리와 악당들이라는 이분법 속 악당 척결을 위한 대결의 구도다. 하지만 현실은 복잡계이고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보이는 상이 달라진다. “동유럽으로 1인치도 확장하지 않겠다”던 서구의 약속이 과거 소련 위성국들의 나토 가입으로 깨지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서유럽의 동진은 근본적으로 ‘러시아 클럽’보다 ‘서구 클럽’이 더 매력적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정치에서 가장 위험한 건 스타워즈 리더십이다. 세상을 불의한 제국군과 고통받는 저항군으로 가른 뒤 무법적이고 타락한 자들을 물리쳐 정의를 구현하자는 리더십은 현실을 가리는 맹목적 지지를 양산하곤 한다. 선과 악, 순결과 타락은 절대자인 신과 불완전한 나와의 관계에서 추구하는 신앙의 영역에 남겨 놔야 한다.

푸틴과 추종자들에게 우크라이나 침공은 장엄한 전쟁일지 모르나 세계는 이로 인해 고통받고 시험받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러시아가 얻을 게 있는지도 불투명하다. 러시아가 지상군을 동원해 우크라이나 수도까지 진격했음에도 반러 정권이 건재한 상태로 전쟁이 끝날 경우 러시아의 실패다.

게다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뒷배인 미국과 전쟁을 치르며 국력을 쏟아부었는데, 그 싸움의 이득은 중국이 취할 가능성이 등장하고 있다. 재주는 러시아가 넘고 이득은 중국이 챙기는 경우의 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대만 침공 명분을 만든 중국이 유럽에서 힘을 투사해 기운이 빠진 미국을 상대로 양안에서 정면 대결을 벌이는 시나리오다.

기자 프로필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오피니언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