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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철학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자

[ 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

출생 - 사망 1889.4.26. ~ 1951.4.29.

21세기를 목전에 둔 1999년, 시사주간지 <타임>은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을 백 명 선정했다. 그 중에 순수하게 철학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 포함되어 있는데, 그가 바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이다. 이견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철학자로 비트겐슈타인을 꼽는 데 동의한다. 사실 20세기의 철학자 중에서 자신의 사도를 거느리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 정도일 것이다. 그렇게 엄청난 영향력을 미친 철학자의 철학이라면, 그리고 사도와 같은 추종자를 가진 철학자의 철학이라면, 적어도 추종자들 사이에는 그의 철학에 대한 해석에 별 이견이 없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이다. 현대 철학자 데넷(D. Dennett)이 말한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이 열렬한 신봉자들을 계속해서 유혹하는 이유는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비트겐슈타인이 많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비트겐슈타인의 글은 체계적이지 않고 표현도 불분명하다. 그의 철학의 이런 특징은, 많은 비트겐슈타인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그의 철학을 요약하거나 그의 철학에 대한 체계적인 주석을 제공하려는 작업을 어렵게 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삶과 철학에 대한 대체적인 그림을 그려보자.


수리철학에 몰두한 비트겐슈타인 러셀을 만난다

비트겐슈타인(오른쪽 아래)과 그의 남매들.<출처: Wikipedia>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1889년, 오스트리아의 부유한 철강업자의 5남 3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의 고급스러운 예술적 취향은 루트비히에게도 교향악의 지휘자라는 음악가의 꿈을 갖게 했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비교되기도 했던 맏형 한스의 음악적 재질이나, 1차 세계대전 중 오른팔을 잃었지만 한 손으로 피아노를 연주했던 넷째 형 파울의 능력에 비하면 루트비히의 음악적 재능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것 같다. 루트비히는 결국 아버지의 권유로 기술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공학을 공부하게 된다. 그 후 19세에 항공공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영국 맨체스터 대학으로 유학의 길을 떠나, 3년 동안 항공공학을 공부한다. 그러나 그 곳에서 그는 공학자체보다 수학적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특히 그 무렵 그는 러셀의 [수학의 원리]를 읽고 수리철학의 문제에 몰두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철학에 대한 관심은 러셀을 만나면서 중요한 전기를 맞게 된다. 1911년, 청년 비트겐슈타인이 러셀 앞에 등장한 것은 철학사에서 가장 운명적인 만남 중 하나일 것이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을 만난 것이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정신적 체험이었다고 술회하면서, 그를 ‘천재의 완벽한 전형’이라고 칭했다. 케임브리지(캠브리지)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러셀 이외에도 러셀이 소개한 논리학자 존슨, 그리고 당시 케임브리지의 대표적인 철학자였던 무어(Moore)를 비롯해, 경제학자 케인즈, 평론가 스트라치 등과 교류하면서 공부를 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의 케임브리지 생활은 3년 남짓으로 끝나고 만다. 러셀을 비롯한 케임브리지의 철학자에게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판단한 비트겐슈타인은 1913년 홀연히 케임브리지를 떠난 것이다.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군에 지원한다. 그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자신의 실존적 체험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케임브리지에서 러셀 등과 논의했던 철학적 생각들을 발전시켜 기록해 나갔다. 그는 이 전쟁에서 이탈리아 군의 포로가 되어 10개월 정도의 포로수용소 수감 생활을 겪고, 1919년 그 곳에서 석방되는데, 이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의 전기 철학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논리 철학 논고](이하 [논고]로 약칭함)를 완성한다. 그리고 그는 이 원고를 러셀과 프레게에 보내고, 이로써 철학의 문제는 모두 해결되었다고 믿으면서 철학계를 떠난다.


언어와 실재 사이의 구조적 동일성 언어는 실재세계를 묘사하는 논리적 그림이다

[논고]의 핵심적인 사상인 그림이론을 한 마디로 설명하면, 언어는 실재의 논리적 그림이라는 것이다. 사진이 음영에 의해서 표시되는 점과 선이 원근법에 의해 배열되어 실재세계를 표상하는 것처럼, 언어는 논리적 규칙에 의해서 실재를 묘사한다는 점에서 언어는 실재에 대한 논리적 그림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림과 마찬가지로 언어와 실재 사이에 성립하는 구조적 동일성을 상정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와 실재 사이에 성립하는 구조적 동일성을 논리적 형식이라고 한다. 즉 언어가 실재세계를 묘사하는 논리적 그림일 수 있는 이유는 언어와 실재세계가 구조적으로 동일한 형식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케임브리지에서 만난 비트겐슈타인(좌)과 러셀(우), 청년 비트겐슈타인이 러셀 앞에 등장한 것은 철학사에서 가장 운명적인 만남 중 하나일 것이다. <출처 : Wikipedia>

비트겐슈타인이 상정하는 언어와 실재 사이의 구조적 동일성을 살펴보자.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고, 사실들은 사태의 존립, 즉 발생한 원자사실들의 결합이며, 사태는 대상들의 결합이다. 이와 유사하게 언어는 복합명제의 총체이고, 복합명제는 원자명제들의 논리적 결합이며, 원자명제는 이름들의 결합이다. 이렇게 대상과 이름 사이에, 사태와 원자명제 사이에, 사실과 복합명제 사이에 구조적 동일성이 있고, 그 동일성으로 해서 각각의 쌍의 후자는 전자를 묘사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적 동일성으로 해서 “실재는 명제와 비교”(4.05)되기 때문에, 명제의 참과 거짓을 결정할 기준을 갖게 된다. 즉 명제가 사실과 일치할 때 그 명제는 참이 되고, 사실과 일치하지 않을 때 거짓이 된다. 이처럼 명제는 참 또는 거짓으로 분류될 수 있고, 그럴 수 있을 때 명제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사태(원자사실)와 일치하는 원자명제를 참이라고 하고, 그렇지 않은 원자명제를 거짓이라고 해야 한다. 즉 그림관계가 적용되는 기본 단위는 원자명제와 사태로 국한된다. 왜냐하면 복합명제는 그 명제를 구성하는 원자명제들이 구성되는 방식을 세계에서 항상 직접 읽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복합명제가 어떻게 그림으로서 사실을 묘사할 수 있을까? 그는 이에 대해 진리함수론(truth-function theory)으로 답한다.

복합명제는 원자명제들이 논리적 연결사로 결합되어 만들어진다. 앞서 말했듯이, 원자명제는 원자사실을 묘사하고 원자사실에 대응할 때 참이 된다. 그러나 복합명제에 포함되는 ‘그리고’ ‘또는’과 같은 논리적 연결사는 세계의 무엇을 묘사하는가?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적 연결사에 대응하는 논리적 대상은 없다고 말한다. 복합명제에 포함된 논리적 연결사가 어떤 대상도 묘사하지 않는다면, 복합명제가 어떻게 사실에 대한 그림일 수 있으며, 복합명제의 진위는 어떻게 결정될 수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은 이에 대해 진리함수론을 통해서 대답한다. 진리함수론이란, 모든 복합명제의 진리 값은 그 복합명제를 구성하는 요소명제의 진리 값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주장이다.

이어서 비트겐슈타인은 “명제들은 논리적 형식을 재현할 수 없다. 논리적 형식은 그 자신을 명제들에서 반영한다.”는 말을 통해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고 단지 보여줄 수 있는 것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명제를 통해서 세계를 묘사할 수 있지만, 명제를 통해서 명제와 사실이 공유하는 논리적 형식을 묘사할 수는 없다. 단지 명제를 통해서 그러한 논리적 형식을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그 이외에도 말하여질 수 없고 보여 질 수 있을 뿐인 영역이 있다고 말한다. 말할 수 있는 영역은 참, 거짓을 따질 수 있는 명제들의 총체이다. ‘숫자 7은 초록색이다’는 명제는 거짓이라기보다는 그에 대응한다고 할 만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무의미한(nonsense) 명제이다. 그러나 무의미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비트겐슈타인의 기준에 따르면 참, 거짓이라고 할 수 없는 명제가 있다. 윤리학과 미학의 명제들이 그것이다. 그러한 명제들은 말하여질 수 없고 단지 보여 질 수 있을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하여질 수 있는 것은 분명하게 말하고, 보여 질 수 있을 뿐인 영역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결론 내리면서,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장으로 [논고]를 마무리한다.


초등학교 교사, 수도원의 정원사를 거쳐 다시 철학계로 돌아가다

철학계를 떠난 비트겐슈타인은 산간 마을로 들어가 초등학교 교사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그의 초등학교 교사로서의 열의와 소명의식에도 불구하고 그의 교육 방법은 당시 시골마을의 초등학교에는 적합지 못했던 것 같다. 그의 초등학교 교사로서의 삶은 1926년, 그가 수업 중 체벌했던 학생이 쓰러지는 사건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다시 비엔나로 돌아온 비트겐슈타인은 수도원의 정원사로, 자신의 누이의 집을 설계하는 건축가로서의 삶을 살면서 철학을 잊고 살아간 듯했다. 그런데 1920년대 새로운 논리학과 과학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일군의 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비엔나 서클을 결성하였는데, 그들은 비트겐슈타인의 [논고]를 자신들의 성서처럼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 서클의 좌장격인 슐릭은 비트겐슈타인과의 만남을 추진하지만 그들의 만남은 1927년에야 이루어졌고,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저서가 러셀은 물론이고 많은 철학자들에 의해서 오해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는 특히 램지와의 대화에서 [논고]에서 전개한 자신의 견해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게 되어 철학계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케임브리지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케인즈에게 연락했을 때, 케인즈는 지인들에게 “신이 돌아온다!”고 말했다고 한다. 케임브리지에서의 교수생활도 그에게는 그렇게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고 오래 계속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철학적 문제에 매달려 진지한 사색과 저술 작업을 계속했다. 특히 1930년대 중반 이후는 출간을 목적으로 원고를 썼던 것으로 전해지지만, 그가 죽을 때까지 출간되지는 못했는데, 그가 죽은 후 그의 후기 철학을 대표하는 저서로 [철학적 탐구](이하 [탐구]로 약칭함)로 출간되었다.


전기와 후기의 비트겐슈타인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내가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가리워진 넌센스로부터 뻔한 넌센스로 옮아가는 것이다.”[철학적 탐구]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말의 위장된 모습에 현혹되어 생긴 넌센스를 언어분석을 통해서 밝히는 것이 그의 철학의 과제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후기의 철학관도 전기와 마찬가지로 언어비판을 통해서 철학의 문제를 해소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철학의 철학관은 전, 후기를 막론하고 변함이 없다.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철학이든 후기 철학이든, 대부분의 철학의 문제는 언어의 오해에서 빚어진 것으로, 언어분석을 명료하게 함으로써 해결(solve)되기보다는 해소(dissolve)될 수 있는 가짜의 문제(pseudo- problem)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그에 따르면 철학은 언어 분석을 통한 치료로서의 철학인 셈이다. 그렇다면 전기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철학을 대표하는 [논리 철학 논고] 1922년 판. <출처 : Wikipedia>

[논고]에서 언어의 본질은 실재를 묘사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던 비트겐슈타인은 후기에 와서 언어의 본질이 있다는 전기의 주장을 철회한다. 그는 [탐구]에서 모든 개별적인 언어현상에 본질이라고 할 만한 공통적인 성질은 없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여러 가지 게임에는 제 각각 여러 가지 성질들이 있지만, 모든 게임이 공통적으로 갖는 특징을 발견할 수 없다. 모든 게임이 승부라는 성질을 갖는 것도 아니고, 공통적인 규칙을 갖는 것도 아니다. 이처럼 언어 행위에도 본질이라고 할 만한 공통적인 특징은 없고, 단지 가족유사성(family resemblance)만 있을 뿐이다. 가족유사성이란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한 성질을 일컫는다. 예를 들어서 A, B, C, D 네 명으로 구성된 가족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A와 B는 말투와 걸음걸이가 닮았고, B와 C는 눈매와 웃는 모습이 닮았고, C와 D는 건장한 체격과 키가 닮았고, A와 C는 또 다른 면이 서로 닮았고, B와 D는 또 다른 어떤 면이 닮았을 경우, 네 명 모두 공통적으로 닮은 특징은 없지만, 서로 교차해서 닮은 유사성 때문에 그들을 가족으로 인식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이런 유사성이 바로 가족유사성이다.

전기 철학과 달리, 비트겐슈타인은 [탐구]에서 일상 언어에 대한 기술적 분석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는 언어에 관한 일반적인 이론을 제시하기보다는 철학적으로 문제가 되는 언어가 일상적 용법에서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는가를 면밀히 검토한다. 즉 그는 철학적 언어들이 말의 고향인 일상적 문맥 속에서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를 검토함으로써 전통적인 철학적 문제에 대해 해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중요하게 사용되는 개념이 바로 ‘언어놀이(language game)’이다. 그는 “언어와 그 언어와 뒤얽혀있는 활동들의 전체”를 언어놀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언어놀이라는 개념을 명료하게 설명하지는 않는다. [탐구]에 나타난 언어놀이에 대한 설명을 정리하면, 단순한 형태에서 복잡한 형태에 이르는 다양한 언어, 어린이가 학습을 통하여 모국어를 배우는 과정, 인간의 의사소통 행위 전체를 포괄한다. 그러니까 언어놀이에는 언어자체와 언어와 관련된 행동, 그리고 삶의 조건과 상황도 포함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언어놀이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든지, 그는 언어를 규칙과 관련된 활동으로 규정한다. 언어를 활동으로 보는 시각은 단어의 의미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과 관련된다.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에 대응하는 대상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단어의 의미를 언어에서 사용이라고 말한다. 이때 단어의 사용이라는 것은 곧 그 단어가 쓰이는 언어놀이의 맥락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의 단어는 그것이 언어놀이의 일부로 사용됨으로써 비로소 의미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언어를 인간의 활동 또는 행위로 보는 시각은, 언어란 기호의 체계로서 사용자인 인간의 조건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그 성격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용자인 인간의 조건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규정하는 인간의 삶의 조건을 삶의 형식(form of life)이라고 한다. 즉 언어는 인간의 삶의 형식이라는 구체적인 현장에서 진짜 모습이 드러난다. 그런데 그런 현장을 검증해 보면, 언어의 의미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문맥에 따라 다양한 형식으로 나타난다. 전통적인 많은 철학적인 문제는 그러한 언어의 사용에 주목하지 못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적 문제에 대한 올바른 접근은 일상 언어가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용법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명료화를 위해서 다양한 언어놀이에 참여하면서 단어와 문장들의 의미가 어떻게 생겨나고 사용되는가의 문제에 직접 부딪혀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활동이야말로 철학의 임무라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이다.

발행일

발행일 : 2011. 01. 09.

출처

제공처 정보

  • 송하석 아주대 철학 교수

    불어불문학을 공부하다 철학에 관심을 갖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학교에서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클레어몬트 대학에서 진리론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언어철학, 심리철학, 논리학에 관한 여러 논문을 발표하였고, 우리 사회가 논리적인 사회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리더를 위한 논리훈련]을 출간하였다. 지금은 아주대학교 기초교육대학에서 철학과 논리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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