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파리의 신세계’에 눈이 번쩍…상상은 우리를 날아오르게 한다

이대한

이대한의 ‘연구실 가는 길’

#1. 미국에서 스위스로 건너와 새로운 연구를 시작하며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연구 대상이 ‘예쁜꼬마선충’에서 ‘초파리’로 바뀐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 ‘벌레 유전학자’에서 ‘초파리 유전학자’로의 변신이 대수롭지 않겠지만, 나에게 초파리는 눈이 번쩍 뜨이는 신세계였다.

시험관에서 길러지는 초파리의 모습. 시험관에 담긴 노란 배양 배지를 먹으며 자라난 구더기는 시험관 벽을 타고 기어올라 자리를 잡고 번데기가 된다. 점점 까매지는 번데기 속에서 마침내 날개를 갖춘 초파리가 고치를 뚫고 비행을 시작한다.

시험관에서 길러지는 초파리의 모습. 시험관에 담긴 노란 배양 배지를 먹으며 자라난 구더기는 시험관 벽을 타고 기어올라 자리를 잡고 번데기가 된다. 점점 까매지는 번데기 속에서 마침내 날개를 갖춘 초파리가 고치를 뚫고 비행을 시작한다.

예쁜꼬마선충은 1㎜ 남짓한 작은 벌레이다. 인간이 작은 인간으로 태어나 큰 인간으로 자라나는 것처럼, 예쁜꼬마선충 또한 아주 조그마한 예쁜꼬마선충으로 알에서 깨어나 조금 더 커다란 예쁜꼬마선충으로 자라난다. 하지만 초파리는 다르다. 초파리는 초파리가 아닌 구더기로 태어난다. 그리고 변태한다. 팔다리도 없는 구더기는 생긴 대로 살기를 거부한다. 번데기가 되어 고치 속에서 눈·코·입을 만들고, 팔다리를 뻗고, 날개를 장착한다. 변신을 마친 초파리는 낡은 몸의 껍데기를 벗고 태어날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날아오른다.

변태는 몸의 혁명이다. 알처럼 생긴 번데기는 말 그대로 차원이 다른 동물로 재탄생하는 혁명의 공간이다. 평면을 기어 다니는 2차원의 구더기는 번데기 속에서 3차원 공간을 날아다니는 초파리로 변모한다. 구더기에는 없던 정교한 눈과 복잡한 뇌, 섬세한 날개와 강건한 등근육을 갖춘 초파리는 중력을 이겨내고 장애물을 회피하며 3차원 기동을 할 수 있게 된다.

#2. 변태는 비행과 깊은 관련이 있다. 자동차를 만드는 것보다 비행기를 만드는 것이 더 어렵고 더 큰 비용이 들어가듯, 날아다니는 몸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어 다니는 몸을 만드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새는 그 시간과 에너지를 어미가 만든 알 속에서 얻는다. 초파리는 다르다. 구더기의 삶으로 그것들을 스스로 획득한다. 먹이를 찾아 열심히 기어 다니며 에너지를 축적하고, 번데기 속에서 새로운 몸을 만드는 시간을 확보한다. 하지만 구더기와 번데기가 축적하는 시간과 에너지는 변태의 전제조건일 뿐이다. 많이 먹고 오래 산다고 모든 동물이 날개를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초파리가 비상하는 힘, 날개 달린 몸을 만들어내는 혁신의 원천은 바로 몸의 ‘상상력’에 있다.

알에서 깨어난 구더기의 몸은 ‘상상하는 디스크’로 직역할 수 있는 성충판(imaginal disc)을 열아홉 개나 품고 있다. 성충판은 한 쌍의 날개와 세 쌍의 다리를 포함하여 지금 여기에 없는 미래의 몸이 될 씨앗이다. 작은 세포꾸러미에 불과한 성충판은 번데기가 되기 한참 전부터 날아오르는 꿈을 꾼다. 구더기는 열심히 기어 다니며 그 꿈의 씨앗에 연료를 공급한다. 그렇게 상상을 멈추지 않는 몸은 번데기 속에서 날개를 달고 마침내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사실 완성될 때까지 아무런 기능을 못하는 성충판은 구더기의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를 빼앗아 가는 기생체에 가깝다. 바닥을 기어 다니며 먹이를 찾아 헤매는 구더기에게 초파리가 되는 꿈은 사치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먹고사는 문제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성충판은 구더기에게 말 그대로 ‘쓸모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구더기에게 꿈은 사치가 아니라 투자다. 꿈꾸는 세포들은 변태 이후 구더기의 몸에서 진 빚을 곱절로 갚는다. 중력을 거슬러 날아오를 수 있게 되면서, 구더기 시절 시달리던 포식자와 경쟁자, 기생충이 득실거리는 지상에서 언제든 가뿐히 탈출할 수 있게 된다. 여전히 바닥을 기어 다니는 구더기들을 뒤로하고 공중으로 날아오른 초파리는 정교한 눈과 안테나로 젖과 꿀이 흐르고 매력적인 짝이 있는 새로운 서식처를 향해 우아하게 날아간다. 곤충은 익룡이 출현하기 전까지 1억년 동안 하늘을 비행하는 유일한 동물이었다. 온갖 포식자로 가득 찬 지표면에서 벗어나 먹이와 서식처를 찾아 자유롭게 비행하면서 곤충은 지구상에서 가장 번성하는 동물이 되었다.

#3. 연구의 과정은 많은 면에서 초파리의 삶과 닮아 있다. 연구는 과학자의 머릿속에 떠오른 가설과 아이디어라는 지적 성충판으로부터 출발한다. 과학자는 성충판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구더기처럼 열심히 실험을 수행하여 근거와 증거를 보충한다. 그 과정에서 (종종 예상치 못한) 중요한 발견을 통해 성충판은 놀라운 모습으로 변모해 나간다. 곤충의 날개가 애벌레와 번데기가 축적한 시간과 에너지를 먹고 자라난 작은 세포꾸러미로부터 만들어졌듯, 위대한 과학 이론도 비슷한 과정을 통해 탄생한다. 나비처럼 우아한 과학 이론 뒤에는 한정된 지식과 방법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키워내려는 연구자들의 처절한 노력이 깔려 있다.

학자로 산다는 것 또한 초파리의 삶과 많이 닮아 있다. 모든 초파리가 구더기로 삶을 시작하듯, 처음부터 과학자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이미 존재하는 지식을 습득하는 학생과 달리, 학자는 새로운 돌을 다듬어 지식의 탑을 더 높이 쌓아 올려야 한다. 학생에서 학자로 거듭나기 위해선 변태의 과정이 필요하다. 대학원은 그런 변태가 일어나는 시공간이다. 비유하자면 박사가 된다는 것은 구더기와 번데기의 시간을 견디며 새로운 지적 영토를 발견하고 개척하는 데 필요한 날개를 빚어내는 일이다.

벌레 유전학자에서 초파리 유전학자로의 변신, 스위스로 건너온 건 위험하면서도 짜릿한 ‘도전’
구더기로 태어나 고치 속에서 눈코입을 만들고 날개를 다는 초파리…이 놀라운 혁신의 원천은 ‘성충판’
궁핍함과 싸우며 간직해온 꿈, 나도 내일의 멋진 비상을 위해 오늘 변태의 시간을 준비한다…‘fly’

돌이켜보면 20대의 나에게 과학자의 꿈은 구더기의 성충판이나 다름없었다. 반지하를 전전하는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나는 과학자가 되는 꿈에 청춘을 쏟았다. 돈이 되는 당장 ‘쓸모 있는’ 일을 하는 대신 1㎜ 남짓한 작은 벌레를 매일 들여다보며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그 고민의 시간이 모여 나는 서서히 과학자가 되어갔다. 우리가 자연과 생명에 대해 무엇을 모르며 어떤 것을 알아내야 하는지, 그러한 앎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실험을 설계해야 하는지, 예상과 다른 실험 결과를 어떻게 해석하고 대처해야 하는지를 깨우쳐 갔다. 그렇게 과학자로 성장하는 시간 동안 나의 성충판은 국제학술지에 발표된 논문으로, 또 박사학위로 자라났다.

박사학위와 논문은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방법을 습득했으며, 그 힘으로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앎을 이룩했다는 증표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그 증표는 국경 없는 학문의 세계에서 일종의 ‘시민권’으로 나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대학과 연구소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일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30대의 시작과 함께 나는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 그리고 이제 대서양 건너 스위스에서 연구자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알프스와 레만호의 풍경이 병풍처럼 펼쳐진 나의 직장, 연구소로 출근하는 길에 나는 종종 생각한다. 유라시아 대륙 반대편 끝의 작은 나라, 그 나라에서도 지방의 중소도시에서 나고 자란 내가 전 세계 최고의 인재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연구하는 이 멋진 곳까지 날아올 수 있었던 것은, 과학자의 꿈을 품고 버텨냈던, 가난했지만 순수하고 치열했던 청춘 덕분이라고. 그 청춘을 먹고 마신 성충판이 날개가 되어 나를 여기까지 비행할 수 있게 해준 것이라고.

#4. 사실 미국을 떠나 스위스로 건너온 것은 꽤나 위험한 선택이었다. 10년 동안 연구한 예쁜꼬마선충과 익숙한 연구 주제를 두고 초파리라는 새로운 모델과 새로운 연구 주제에 도전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알고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많은 예쁜꼬마선충 학계를 떠나 낯선 초파리 학계에 새로 진입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초파리에 대해서도, 신경계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많지 않았기에 나에겐 두 번째 박사후연구 과정을 시작하는 것이 다시 대학원생 시절로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비유하자면 날아다니는 초파리에서 스스로 날개를 버리고 구더기로 회귀하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초파리 학회에 참석하면 아는 사람도 없고 내 발표 내용도 보잘것없게 느껴져 대학원생 때 느꼈던 ‘쭈구리’의 기분이 오랜만에 다시 들기도 했다.

암울한 이야기처럼 들림에도 내가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신경계 진화’라는 새로운 지적 성충판을 키워보겠다는 꿈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스위스에서 다시 구더기가 되어 보낸 지난 1년 반은 즐거운 성장의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인자한 지도교수 리처드와 상냥한 동료들 덕분이었다. 비록 초파리는 처음이지만 과학자로서의 나의 자질과 잠재력을 믿어준 리처드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열심히 배우며 새로운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었다. 동료들은 내가 초파리와 친해질 수 있도록 실험 기법을 언제나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덕분에 이제 나는 초파리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뇌를 능수능란하게 해부하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동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긴 했지만, 초파리의 세계에서 나는 여전히 변태의 여정을 앞둔 구더기다. 새로운 한 해 동안에도 열심히 먹고(공부하고), 열심히 기어 다니는(실험하는) 성장 과업에 매진하며 다가올 변태의 시간을 준비할 것이다.

#5. 파리는 영어로 ‘fly’다. 그런 멋진 이름을 얻게 된 건 구더기의 몸이 비상을 꿈꾸는 디스크를 품은 상상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멋진 초파리를 연구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실험실로 향한다. 작은 초파리를 통해 드넓은 지적 영토를 함께 개척해 나가는 동료 연구자들이 있는 ‘플라이룸’으로, 고치 속에서 새로운 몸을 빚고 있는 우리의 지적 성충판이 날개로 피어나는 순간을 꿈꾸며. 이 상상의 끝에 비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믿으며.



[다른 삶]‘초파리의 신세계’에 눈이 번쩍…상상은 우리를 날아오르게 한다

▶이대한

예쁜꼬마선충이라는 작은 벌레를 연구하며 청춘과 박사학위를 맞바꿨다. 연구 말고도 하고 싶은 게 많은 청년이었지만, 박사가 되었음에도 생명과 생물학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하다는 부끄러움 때문에 다른 길로 빠지지 않고 박사후연구원 생활을 시작했다. 태평양 건너 미국 노스웨스턴대학에서 3년 동안의 연구를 마친 후, 대서양 건너 스위스 로잔대학에서 초파리를 해부하며 뇌의 진화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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